[조호연 칼럼]볼턴을 키운 것은 8할이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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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호연 칼럼]볼턴을 키운 것은 8할이 북한이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3. 13.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시시포스를 떠올리게 했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아래로 굴러떨어져 형벌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북·미 협상도 9부 능선에서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항우의 가랑이 밑을 기어간 한신’ 소리까지 들어가며 만든 자리 아닌가. 그보다 한반도 평화의 소중한 기회가 무산된 것이 더 실망스럽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 멈추는 순간 우리의 운명은 또다시 남의 손에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북·미 협상은 늘 오해의 게임이었다. 도발하면 언제나 미국이 움직일 것이란 북한의 오해, 제재하면 북한이 협상 무대로 나올 거란 미국의 오해가 합세해 진전을 막았다. 하노이에서도 이런 맹신이 진지한 협상을 방해한 듯하다. 마지막 기회였다면 트럼프가 일괄타결을 밀어붙이지 않았을 테고, 김정은은 회담을 연장해서라도 파국을 막으려 했을지 모른다. 회담을 낙관한 우리 정부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2월28일 오전(현지시간) 하노이 소피텔레전드메트로폴호텔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단독 정상회담 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두 정상의 2차 정상회담은 합의 없이 종료됐다. 하노이 _ AP연합뉴스


하노이합의 실패의 또 다른 요인은 미 국내 정치였다. 트럼프가 ‘빅딜’을 밀어붙인 것도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2005년에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도출한 바로 다음날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다. 대북 강경 노선의 조지 부시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공동성명을 파기하려 한 것이다. 비핵화는 무산됐다. 김정은도 다르지 않다. 2012년 2·29합의 직후 느닷없이 장거리 로켓 발사를 예고했다. 신생 세습 정권이 세를 과시하고 권력입지를 다지기 위해 합의를 희생양으로 삼은 셈이다. 


국내외 정치의 연계는 흔히 불신과 반목의 축적을 낳는다. 대화론자들이 물러나고 강경론자들이 득세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추후 협상이 성사돼도 이런 현실이 발목을 잡기 십상이다. 30년 역사의 북핵 문제가 냉·온탕을 오가며 해결의 가닥을 잡지 못한 이유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예고 당시 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대북 대화를 포기했고, 상처받은 대북 대화파는 매파로 옮겨갔다.


국내외에서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비난하는 말이 나온다. 하노이에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판을 깼다고 보는 것이다. “재수없는 사람”이란 거친 표현도 등장했다. 그가 북핵의 고비마다 등장해 악역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제2 북핵 사태나 지난해 1차 북·미 정상회담 무산위기도 볼턴의 간여 속에서 발생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비난에 100%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선제타격을 주장할 정도의 대북 강경론자이지만 하노이 협상을 망친 당사자가 될 수는 없다.


볼턴은 물속에 거대한 밑동을 숨긴 채 겉에 노출된 빙산 같은 존재다. 미국 행정부와 정치권, 주류사회에는 수많은 ‘볼턴’이 활동하고 있다. 어디 미국뿐인가. 하노이합의 실패에 반색한 일본 정치권과 한국의 보수 야당에도 ‘볼턴’은 존재한다. 이들은 남북 및 북·미 간 불신과 반목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다. 서정주 시인의 말을 빌리면 볼턴과 그의 ‘동기들’을 키운 것은 8할이 북한이다.


지금 북·미에 필요한 것은 행동으로 비핵화 의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구체적인 조치로 신뢰를 쌓고 그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얻은 교훈도 비슷하다. 평양은 핵폐기에서 실질적 진전이 없으면 제재타파 문제의 진전도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워싱턴 역시 북한의 행동에 맞춰 한반도 평화구축과 제재 해제를 추진하지 않고는 비핵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태생적 볼턴’은 아니라도 최소한 ‘변심한 볼턴’들의 마음을 달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북핵은 한반도 정세의 암덩어리이지만 그것을 제거한다고 해서 한반도 문제가 완전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북핵이 없던 시기에도 한반도에 평화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불신과 반목이 해소돼야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가 풀리고, 평화·번영의 땅으로 변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북한과 미국 모두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대북 제재가 일반 국민경제는 물론이고 통치자금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는 상황을 오래 견디기 힘들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핵개발을 저지해야 화급한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핵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는 북한의 핵탄두가 100기가 넘어가면 이른바 ‘최대억제’ 국가로 올라서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전략적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미 간 ‘간보기’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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