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연 칼럼]비핵화는 왜 보수를 위기에 빠뜨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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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호연 칼럼]비핵화는 왜 보수를 위기에 빠뜨리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4. 24.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핵실험장 폐쇄 발표를 전 세계가 환영했지만 자유한국당만 쇼라며 평가절하했다. 홍준표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핵동결 발표를 마치 핵폐기선언 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은 2008년 영변 냉각탑 폭파쇼를 연상시킵니다. 남북평화쇼를 하고 있는 문 정권은 참으로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아무말대잔치나 독설을 넘어서는 위험수위 발언이다. 상황 왜곡과 악의가 담겨 있다.

 

지금 한반도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사변적 사건들이 연이어 전개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명이 나왔고, 이를 논의할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릴 예정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핵실험장 폐쇄는 한·미 정상과의 담판 시 협상 카드로 쓸 것으로 예상했는데 회담 전에 선제적으로 양보한 것이 합리적인 상황 판단일 것이다. 국가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니 실천력도 담보됐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비핵화를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실패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행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나흘 앞둔 23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남북한과 미국은 비핵화를 위해 지난 4개월여간 일관된 노력을 전개해왔다. 이 같은 노력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지금 전쟁의 광기에 휘말렸을지 모른다. 벌써 군사 충돌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북한은 5개월째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고 있고, 북·미 간에는 ‘말폭탄’ 대신 평화의 언어가 오가고 있다. 이 모든 게 쇼라면 차라리 쇼를 선택하고 싶다.

 

비핵화는 보수에게 위기로 작용할 것이다. 비핵화는 단순한 북핵폐기를 넘어 북한의 정상국가화 즉 외부세계와 외교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국가로의 변신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 국가 전략을 전환한 것은 이를 위한 안배로 해석된다. 그러나 북한의 정상국가화는 남북 대결구도에 안주해온 한국 보수의 정체성을 위협할 것이다. 북한 체제는 시대착오이고 모순이기 때문에 그냥 놔둬도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는 케케묵은 대북관 탓이다. 보수가 ‘나쁜’ 북한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호시절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착해진’ 북한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 비핵화 노력을 깎아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실패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붓는 것은 입지를 축소하게 될 것이다. 북핵 해결이 아니라 북한 붕괴를 시도하다 북핵 고도화를 방치하고 시간만 낭비한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라도 달라져야 한다.

 

비핵화 프로세스의 폭풍은 동북아 질서도 근본적으로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 비핵화로 인해 북한의 위협이 감소되면 한·미 동맹의 기반은 침식당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한·미동맹의 대척점에 서 있던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정치적 입장을 재설정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한반도 정세구도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양상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런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단초적 현상은 벌써 작동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의지를 북한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확실하다”고 확인해주고, 북한이 핵포기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해명해주는 현실이 그것이다. 조만간 김 위원장이 한·미 정부의 입장을 대신 해명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 못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남·북·미 3국 지도자가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핵화 3각 협의체’라고 부를 만하다. 이는 향후 비핵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남·북·미 동맹’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 같은 현실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 개최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 보수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김 위원장은 못 믿을 테고, 문 대통령은 믿기 거북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트럼프 대통령만은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한반도의 비핵화 및 평화 체제 바람은 역사가 손짓했을 때 3국의 지도자가 순응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한국 보수는 시대착오적 미망을 버리지 못한 채 역사의 전환점에서 방황하고 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악마화된 북한 관념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가하면 된다. 현실을 부정하지 말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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