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일 외교장관 회담과 국민 눈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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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시론]한·일 외교장관 회담과 국민 눈높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6. 19.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이렇게 냉랭한 분위기로 맞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한·일 양국에 새 정권이 출범한 지 2년 반이 되도록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비정상적이지만, 아베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적 태도에 엄중히 대응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는 단호한 자세를 유지하더라도 외교장관 회담은 좀 더 일찍 가동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동안 대외적으로 한국의 대일외교 자세가 지나치게 경직되었다는 인상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외교장관 회담을 본궤도에 올려놓고 자칫 썰렁해질 뻔했던 50주년 기념행사에 윤병세 장관이 참석하기로 한 것은 다행이다. 이것이 침체된 한·일 관계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이 21일 도쿄의 외무성 이이쿠라 공관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주의할 점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눈높이 맞추기다. 회담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눈높이를 너무 높게 잡아서는 안 된다.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 한·일 간의 외교채널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지난 5월 한·일 재무장관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다. 과거사 문제와 경제·안보를 분리하는 ‘투 트랙 외교’가 뒤늦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외교장관 회담 개최를 통해 이러한 정책 기조가 본격화되는 셈이다.

현재 양국 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아베 담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 집단적 자위권 해금에 따른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 등 여러 가지 현안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한 차례의 외교장관 회담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게다가 아베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자기주장이 강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맞대응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일본을 상대하려면 치밀한 논리적 무장과 얼음 같은 냉정함이 필요하다. 정부가 이번 외교장관 회담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무리하는 일이 없도록 국민들이 스스로 눈높이를 조절해 줄 필요가 있다.

반대로 정부가 눈높이를 함부로 낮추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다. 자칫 국민 여론을 잘못 읽고 안이하게 눈높이를 낮게 잡았다가는 나중에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막바지 협상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외교장관 회담에서 어떤 성과가 나올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문제는 조속한 해결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해결이 더욱 중요하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되어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본에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는 입장이다. 청구권협정에 대한 양측의 해석이 180도 다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입장을 관철시키기는 지난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주장을 양보할 수도 없다. 이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다.

50년 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에는 경제협력과 안보협력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에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을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외교의 기본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다른 문제는 몰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만큼은 실리보다 명분을 지켜달라는 것이 피해자와 국민들의 여망이 아닐까.

피해자들의 평균 연령이 90세에 가까운 점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핵심적인 부분을 쉽게 양보하고 타협해서는 곤란하다.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이 문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외교장관 회담이 정상회담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8월의 아베 담화를 지켜보면서 차분하게 판단해야 한다. 처음부터 정식 정상회담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우선 한·중·일 정상회담 등 하반기 다자외교 기회에 정상회담을 갖는 우회 전략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전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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