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셔먼 ‘설화’와 일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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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셔먼 ‘설화’와 일방주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3. 8.

“어느 곳이든 정치인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합니다.” 미국 국무부 최고위관리 웬디 셔먼의 최근 발언이 한국 사회를 자극하고 있다. 그 진술이 미국의 공식 견해인지, 의도적이었는지 의구심과 반발 움직임이 확산되자 특정인이나 특정 국가를 겨냥한 발언이 아니라는 국무부의 외교적 해명이 뒤따랐다.

셔먼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7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말 미국과 동북아시아 3국의 관계에 집중해 연설하면서 해병대원이었던 아버지의 과달카날 전투 참가와 부상, 유엔 헌장의 서명을 지켜보길 원한 부모의 샌프란시스코 방문 등 개인적 경험담을 곁들였다.

1990년대 말 다양한 배경의 미국인 145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과거의 존재: 역사의 대중적 활용>을 집필한 미국 역사학자 로이 로젠츠바이크와 데이비드 셀렌에 따르면, 학교 역사교육은 미국인들에게 과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더욱이 인종이나 종족에 따라 미국인의 과거 접근 방식이 달랐다. 대다수 백인들이 개인의 경험에 근거해 과거를 해석하길 선호하는 반면, 아프리카계나 원주민들은 노예제, 민권운동, 원주민과의 협정 위반 등 널리 공유된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이해하곤 했다. 인종에 따라 역사적 기억의 층위가 다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특정 집단을 벗어나고 싶은 껄끄러운 기억과 정치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 미국 역사학자 마이크 윌리스는 과거를 현재와 떼어놓고 생각하게 만드는 미국 문화의 단면을 ‘역사 파괴적’이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그것이 개인의 경험을 넘어 집단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눈을 갖도록 도와주지 않거나 폭넓고 구조적인 역사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과거사 인식의 주체는 유엔 같은 국제기구, 각국 정부와 공식 역사교육만이 아니다. 아래로부터의 과거사 정리 요구를 회피하거나 역사 인식의 민주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과거사 정리는 또 다른 충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과거사 정리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래를 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규명해야 할 과거를 덮는다면 미래의 방향을 건설적으로 설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동시에 의미 있는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유산, 다양한 시간 요소와 더불어 잘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시민단체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한 회원이 3일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과거사 발언을 규탄하는 1인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해방 정국은 물론이고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역시 독도 영유권을 비롯한 양국의 과거사 정리를 경시하고 졸속으로 처리되었다. 그것은 비민주적 토양과 냉전 대립의 구조가 빚어낸 속전속결과 함량미달의 결정이었다. 셔먼이 바라는 대로 조화롭고 협력하는 동북아시아의 전제는 이 해묵은 숙제의 마무리다.

글자 그대로 보면 셔먼의 충고는 민족주의적 대립 감정을 향한 뼈아픈 성찰의 촉구일 수 있다. 이 발언이 최근 어렵사리 외교관계 재개에 합의한 미국과 쿠바의 사례에 적용되었다면, 달리 말해 그동안 형편없이 작은 적대국을 비난하면서 값싼 박수를 받아온 미국 보수 정객들의 비판적 성찰을 호소하는 것이었다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셔먼은 질의응답 시간에 전후 7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성찰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지역 내 동맹국의 협력을 역설하는 마당에 민족주의적 감정을 가장 부당하게 활용해온 과거 침략국의 오만함을 묵인하고 패권국의 부주의한 훈수를 드러내며 과거를 현재와 떼어놓고 생각하려는 비역사적 발상을 부추기고 혹시 2013년 10월 이란인들의 분노를 자아낸 “속임수는 그들 DNA의 일부”같이 무례한 셔먼의 설화가 재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성찰 없는 일방주의일 뿐이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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