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100여년 전 ‘국권 침탈 그림자’의 엄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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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시론]100여년 전 ‘국권 침탈 그림자’의 엄습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3. 9.

미 국무부 소속 웬디 셔먼 정무차관의 지난달 27일 발언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반발이 거세다. 셔먼 차관은 과거사를 이대로 묻어두고 가야 하는데 한국과 중국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요지로 발언하였다. 민족감정을 이용한다느니, 정치인들이 ‘값싼 박수’를 얻으려 한다느니 거친 발언을 서슴없이 하면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자존감을 건드렸다.

언동론은 미국이 속내를 드러냈다고 평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고자 추진한 재균형 전략에 차질이 생기자 나온 발언이라고 분석한다. 셔먼도 인식했듯이, 역사 문제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다른 외교 현안의 종속 변수가 아니라 독립한 상수이다. 역사 문제는 교육과 인식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핵심적 현안이자 미래전략의 문제이다. 그래서 과거사를 풀어가는 해법 찾기도 이 점까지 고려해야 한다.

미국은 일본의 도움 없이 동아시아에서 대중국 견제 전략을 완비할 수 없다. 일·미동맹의 응결점인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베는 이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참가를 거부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일본을 끌어들였다. 이는 ‘아세안+3’을 중심으로 다자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중국, 한국과 다른 지향이다.

미국이 동아시아가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사인식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전략적 이해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사례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배우는 1905년 7월의 카쓰라태프트밀약이 있다.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독점권을 묵인하는 대신 필리핀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미국은 1898년 필리핀을 차지한 후 동아시아 정책의 모토로 문호개방과 이익균점을 내세웠지만, 밀약에서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밀약을 체결한 일본은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한반도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기 직전부터 미국이 중재하는 러시아와의 전쟁 종결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도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하였다. 결국 협상을 주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1921년, 동아시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회의가 열렸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지배를 부정하고 독립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지만, 회의장 문턱도 밟지 못했다. 워싱턴회의에서 미국은 중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한편, 중국과 태평양에서 일본의 권익을 인정함으로써 동아시아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열강 사이에 협력관계가 형성된 이때의 제국 지배 공조체제를 워싱턴체제라 한다.

2010 일중한동아시아문학포럼 (출처 : 경향DB)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첫 국제회의는 1943년 카이로회담이었다. 회담에서는 한반도를 즉각 독립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전쟁동원 체제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중요한 미래가 결정된 것이다. 그때의 결정은 더 이상 구체화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카이로회담의 결정을 구체화하여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이처럼 짧다면 짧은 한국 근대사에서 한반도 문제는 동아시아의 제2차 현안, 아니면 그것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열강이 다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보조 사안인 경우가 많았다. 주로 중국 문제의 주변 문제였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셔먼 차관의 발언을 곱씹어 보면, 100여년 전에 겪었던 참담한 아픔이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망언은 역사의 진실을 확립하고 한국의 ‘자주’를 상상할 수 있는 전략적 미래 기획이 없는 우리의 현실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너희들 또 당한다고.


신주백 | 연세대 HK(인문한국)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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