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우위를 지켜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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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도덕적 우위를 지켜야 이긴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7. 20.

지난 5일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이 메이지 산업혁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이 시설에서 조선인 징용자와 전쟁포로들의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유산 등재가 불가능한 상황에 몰리자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등재 작업을 주도한 가토 교코(加藤康子) 내각관방참여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세계유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일본이 허용하고만 것이 분하다”고 말한 것에서 이번 사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지난 3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이 시설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세계유산위원회에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만 해도 일본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자신했다. 한국의 반발 정도는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앞세워 뭉개고 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이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유네스코의 산하 기관에서 오랫동안 치밀하고 야심차게 준비해온 ‘역사 세탁 작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은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의 외교적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장이 확고한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다고 해도 조선인 징용자와

반도인도망방지철조망신축"…조선인강제노동문서_연합뉴스

전쟁포로들이 노예 노동을 강요받았다는 명백한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일본을 지지할 수 있는 문명국가는 없었다.


일본은 결국 메이지 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대가로 강제노동을 인정해야 했다. 이 문제로 인해 일제의 강제노동 사실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재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일본은 정부대표인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대사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명백하게 강제노동을 인정했음에도 국내적으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사토 대사의 해당 발언이 일본 외무성의 공식자료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도록 감춰버렸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은 한술 더 떠서 “조선인 징용은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적극 설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그런 궤변이 통할 리도 없고 오히려 강제노동 사실을 국제사회에 더욱 널리 알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은 일본이 더 잘 안다. 지금 일본의 강경 자세는 “한국의 훼방을 허용해버렸다”며 아베 정부를 비난하고 있는 보수세력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궁극적으로 일본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다. 인류보편적인 가치에 비춰 한국의 주장이 도덕적으로 훨씬 우월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들이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배에 따른 과거사 문제에 국제사회가 그리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또 한·일 양자 간의 문제에는 잘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제노동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의 인권 문제는 누구도 외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서 한국이 지향해야 할 첫번째 원칙은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한·일 간의 최대 현안인 위안부 문제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일본에 책임을 인정하라고 다그치기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의 지위와 위신이 깎이고 이로 인해 커다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본이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도발과 궤변에 자극받아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반을 둬 과도하게 주관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일본에 ‘물타기’를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자칫 한국이 갖고 있는 도덕적 우위를 상실하고 국제사회에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 쓰시마 불상 반환 금지 조치,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재판 등의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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