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기다림의 세월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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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북핵, 기다림의 세월 20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9. 14.


헨리 키신저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들이 모두 모여 북핵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한다면 그것은 외교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한·미는 그동안 북한체제에 곧 한계가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진지한 북핵 외교를 하지 못했다. 한 방에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드는데 험난하고 까마득한 협상의 길을 걸어갈 의욕이 생길 리 없다.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는 뿌리가 깊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는 탈냉전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소련과 수교하면서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는 것은 한사코 막았다.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던 시절이어서 북한도 곧 무너질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탈출구는 핵무장이었다. 1990년대 초반 북핵 문제가 불거진 뒤 미국은 우여곡절 끝에 북한과 협상을 벌였고 1994년 10월 북한의 핵포기 대가로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것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가 만들어졌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받아들이되, 그 시기는 경수로 건설이 ‘상당히’ 진척돼 ‘핵심 부품을 북한에 인도할 때’로 정했다. 미국은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가장 중요하고 이행하기 어려운 핵심 사안을 10년 정도 뒤로 미뤄놓은 이유는 그 사이에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네오콘이 장악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핵 협상에 나선 것은 의외였지만 근본적 해결책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임기 말 ‘외교적 업적 쌓기’가 목적이어서 어려운 문제는 모두 뒤로 돌리고 쉬운 것부터 해결하는 단계적 접근법을 택했다. 쉬운 것부터 해결하다 보면 언젠가 북한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2009년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으로 제 갈 길을 가버리자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김정일이 있는 한 협상은 안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그리곤 건강이 안 좋은 김정일의 수명을 예측하며 기다리기 전략을 택했다. 2011년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시작해 2·29 합의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목적은 현상 유지였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일단 북한과 협상을 시작해 도발과 핵능력 진전을 막고 내부 변화를 기대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를 ‘북한을 상자에 가둬놓기 위한 전략(Boxing North Korea)’이라고 불렀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후 1년 _경향DB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미국은 북한의 변화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북한은 정권의 안정에 매달리면서 2·29 합의 파기, 미사일 발사, 3차 핵실험 등을 감행해 미국의 기대를 저버렸다.

김정은 정권 출범 1년 만에 미국은 “북한의 젊은 지도자에게 실망했다”(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는 말을 남기고 핵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북한 체제에 이상이 생기기를 기다리며 보낸 세월이 벌써 20년을 넘었지만 ‘북한 붕괴’에 대한 기대는 지금도 여전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일 “북한 핵 문제의 가장 빠른 해법은 한반도 통일”이라고 말했다. 통일을 어떻게 이룰지 비전이나 전략을 제시한 적이 없으니 이 말은 북한 붕괴로 통일이 이뤄지면 북핵 문제가 저절로 풀린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4월 낸시 펠로시 미 하원 민주당 대표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도 박 대통령은 “북핵·북한인권 등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내는 해결책은 결국 한반도의 통일이라고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통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실언이 아니라 평소 지론임을 보여준다.

언제일지 모를 통일을 바라보며 북핵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무모하다. 박 대통령은 지금 통일이 아닌 북핵에 매달려야 한다. 다음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의욕이 없는 미국을 설득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내년에는 미국이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고 이듬해 새정부가 출범하면 한국이 대선 국면을 맞는다. 의미있는 한·미 정상회담이 다시 열리려면 2018년에나 가능하다. 그때쯤이면 박 대통령의 기대대로 통일이 돼 있거나, 핵탄두 소형화와 장거리미사일 프로그램이 모두 완료된 북한을 마주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유신모| 외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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