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담대한 구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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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무엇을 위한 ‘담대한 구상’인가

by 경향글로벌칼럼 2022. 8. 19.

윤석열 정부의 이른바 ‘담대한 구상’은 역대 정부의 대북 제안 중 가장 적극적이고 구체적이며 가장 큰 규모의 대북 지원 계획이다. 그러나 북한이 호응할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북한의 호응을 기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담대한 구상은 ‘비핵화 조치와 경제 지원 교환’이라는, 이미 과거에 실패한 틀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정부는 경제적 지원 외에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두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것이 포함돼 있다 해도 새롭지 않다. 경제 지원과 안전보장은 북핵 협상 초기부터 항상 함께 고려됐던 사안이다.

북한이 지키려는 것은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과 세습독재 체제다. 따라서 안전보장 조치를 제공해도 북한은 안심하지 않는다. 경제 지원도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받아들일 수 없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국제 금융 등의 지원을 받고 중국·베트남 수준으로 개방하면 정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할 처지가 아니다. 담대한 구상은 이 같은 북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담대한 구상에는 북한이 관심을 가질 요소가 없다. 오히려 모욕감을 느낄 요소가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반도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담대한 구상의 핵심적 요소로 소개하면서 이 계획이 과거 이라크에게 적용됐던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원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은 걸프전 패배 이후 경제봉쇄를 당하던 이라크에 석유 수출대금으로 식량을 살 수 있도록 미국 주도의 유엔이 허용한 조치다. 인도주의적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라크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이라크의 석유 수출대금은 유엔의 에스크로 계좌로 예치됐다. 이라크는 전쟁배상금이 우선 결제되고 남은 돈으로 식량과 의약품만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받았다. 한반도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은 전쟁배상금 징수를 위해 패전국에 내려졌던 조치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계획을 북한에 적용하겠다는 발상이다. 이러고도 윤석열 정부는 “북한이 호응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진정성이 있는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논의의 기초가 될 만한’ 제안을 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가 있다. 북한이 흥미를 느껴야 하고 미국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해야 하며 중국이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북핵 협상 30년 역사에 한국 정부가 이런 제안을 내놓은 적은 한번도 없다. 역대 정부가 저마다 내놓은 대북 구상은 모두 초기에 사라졌다. 문제 해결보다 한국이 뭔가를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공동의 포괄적 접근법’으로 미국을 설득해 북핵 협상을 진전시켰다고 홍보했으나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대북 대화에 적극 나서긴 했지만, 그것은 국내정치적 다이내믹스가 작용한 결과였을 뿐 한국의 구상과는 무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방미 기간에 맞춰 ‘그랜드바겐’이라는 대북 구상을 요란하게 발표했지만, 바로 그다음 날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가 “우리는 모르는 이야기”라고 반응하는 외교 참사를 빚었다. 박근혜 정부의 ‘코리안 포뮬러’ 역시 세부 내용을 만들기도 전에 사라졌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계획을 미국과 협의했다고 했지만 미국이 내용에 관여한 것은 아니다. 당장 북핵 협상에 나설 상황이 아닌 미국이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위험한 요소는 없어 보이는’ 한국 정부의 구상에 제동을 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미 국무부의 공식 입장은 담대한 구상 자체가 아닌 ‘대화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담대한 구상은 협상을 위한 제안으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교환하겠다는 의지 대신 내가 정해놓은 룰 안에서 게임을 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 따라서 담대한 구상은 대북 제안(proposal)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대북 결심 또는 다짐(resolution)에 가깝다. 현재 북핵 상황에 맞지 않고 북한을 끌어들일 유인도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국내용으로 보인다. 역대 정부의 대북 구상처럼 허망하게 사라져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통렬히 비판하고 이를 정권교체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윤석열 정부의 첫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실망스럽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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