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한명숙 사건’의 진실
본문 바로가기
현장에 가다 /지난 시리즈

[사유와 성찰] ‘한명숙 사건’의 진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1. 14.
2010.1.14 경향신문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마련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 말은 옳지 않다. 진실은 은폐될 수도, 영원히 미궁 속에 빠질 수도 있다. 강의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동전 던지기를 예로 든 적이 있다. 동전을 던져 교탁에 떨어지게 한 뒤 손으로 덮고 어느 면이 위로 올라왔는지를 물어보았다. 진실은 앞면 혹은 뒷면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확인 없이 동전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는다. 진실은 은폐된 것이다! 내가 그것을 확인했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씨가 인사 청탁과 관련해 5만달러를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에 대한 재판을 앞두고 있다. 검찰은 결정적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한명숙씨 측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하지 않은 일의 직접 증거란 없으니까. 제시할 수 있는 건 정황증거 외에는 없으므로, 현금 5만달러를 어떻게 여성의 호주머니에, 그것도 업무시간에 찔러 넣어줄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제 진실은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게임의 대상이 된다.

입증의 대상서 게임의 대상으로

일본의 명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라쇼몽(羅生門)>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숲속에서 일어난 사무라이 살인사건과 관련한 네 개의 증언이 나온다. 죽은 사무라이의 혼령을 포함한 사건 당사자 세 사람과 목격자의 증언 모두가 달랐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설명한 현장은 각자의 의식적·무의식적 동기에 의해 윤색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무라이의 죽음, 사라진 보석 박힌 검의 행방, 사무라이의 아내에 대한 겁간과 같은 기초적 사실은 동일해도, 각각의 사실에 대한 해석과 인과관계 구성은 완전히 달랐다.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사실이란 게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출처: 경향신문 웹DB


이번 진실게임의 주인공은 검찰과 한명숙씨이며, 주변에 정세균씨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등장한다. 이 게임의 청취자는 시민이고, 배경은 정치이며, 게임 도구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민들은 검찰, 언론들 그리고 당사자들이 만든 이야기를 접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야기는 구성된 것이며, 사실 자체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의식적·무의식적인 동기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을 평가하고 표를 던질 이들이 시민이라는 점이다. 드라마가 시청자를 향하듯, 이 게임도 시민을 향하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은 “한명숙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한명숙 사건’의 진실”이다. 전자는 이 일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표현하고, 후자는 ‘한명숙 사건’이라는 말과 사건의 설정 자체가 하는 기능에 대해 묻는다.

사람들이 ‘한명숙 사건’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한명숙과, 5만달러와, 뇌물이라는 단어를 연결짓게 된다. 실체와 무관하게 말이 기능한다. 이 표현 자체가 한명숙씨의 기존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를 더한다. 사실과 상관없이 말은 이미 정치적 기능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게임의 진정한 플레이어는 ‘말’이다.


거짓이 사실보다 더 그럴듯해

사실과 거짓이 충돌할 때 더 그럴듯한 것은 항상 거짓말 쪽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은 많지만 거짓말은 항상 그럴듯하게 꾸며진다. 거짓말이 사실보다 더 논리적이다.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진실이 결국 밝혀질 것이라는 것은 허구다.

하지만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이 결국 밝혀질 것임을 믿어야 한다. 진실에 대한 신념과 노력이 바른 정치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와 논리가 아니라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한명숙 사건’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