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요즈음의 일들과 민주적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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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지난 시리즈

[사유와 성찰] 요즈음의 일들과 민주적 권력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4. 2.


이번엔 어떤 주제로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요즈음 일들을 종이에 써보았다. 먼저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가 있고,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점입가경의 한명숙 전 총리 재판이 있다. 또 봉은사와 관련해 돌출된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의 좌파 발언도 있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다. 이 리스트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권력이라는 단어가 공통점으로 떠올랐다.
 

우철훈 기자


권력이란 “내 의지를 남에게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막스 베버는 말했다. 그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서만 정치행위를 생각했기에, 권력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남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런 식의 정치행위는 곧 통치행위요, 지배행위다.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고, 권력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상책이다. 지배자의 생각을 피지배자가 알 필요가 없고, 지배층의 이익은 곧 국가 이익이다. 이렇게 이해된 권력은 폭력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국가폭력과 동의어처럼 된다.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에 몇몇 정치학과 교수들과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한 저명한 교수가 “정치란 권력 쟁취를 위한 수단이자,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것이 ‘현실정치’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학자들의 뇌리에 박힌 생각이며, 그에게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생각이다.

진정한 권력은 함께함에서 나와

진정한 권력은 그런 게 아니다. 권력은 사람들의 함께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공동의 뜻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폭정, 과두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권력 개념이다. 폭군의 나라에서 복종은 칼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다. 돈의 힘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복종은 더 많은 경제적 부를 향한 집단적 욕망에서 나온다. 민주적 권력은 복종을 거부하고 인간답게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열망에 기초한다. 이 같은 상식적인 말이라도 요즘 시대라면 되새길 만한 것 같다.

지금까지 10만권이 넘게 팔렸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은 다음 한명숙 전 총리 재판 소식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검찰이 하는 말을 못 믿겠다. 혹 검찰이 이 글을 보고 못마땅하다면, 제발 그 책에 나오는 검찰을 불신하게 만드는 그 수많은 사례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알려 검찰이 믿을 수 있는 조직임을 입증해 주었으면 싶다. 삼성과의 관계도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 주고 말이다. 그래야 검찰의 권력이 민주적이라고 진정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봉은사 일도 권력의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좌파가 빨갱이로 인식된다.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그의 인생이 끝나던 때가 있었다. 요새 부쩍 많이 들려오는 좌파, 빨갱이, 좌빨이라는 말은 소통을 위한 사고를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관계모드를 전략적으로 바꿔 버린다. 대화는 끝난다. 안상수 의원과 명진 스님의 진실게임보다 더 무섭고 무거운 사태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회적 분위기에 있다. 한마디의 말로 상대를 날려버리려 하고, 또 거친 말로 사람들의 사고를 멈추게 만드는 분위기 말이다.

검찰은 하는 말 믿을 수 있게 하라

천안함의 침몰로 실종된 이들은 거의 부사관과 사병들이다. 배의 구조와 폭발이 일어난 지점 때문이다. 비상조치를 취하는 과정이나 사고 전후 정황에 대해 불만과 의문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군이 최선을 다했고 또 다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고통을 받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를 보내며, 아들을 곧 군에 보내야 하는 이로서 아픈 마음을 함께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울부짖는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 사건이 하나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권력이 없는 이들은 고통의 주체라도 사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민주적 권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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