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김정은과 트럼프’라는 시뮐라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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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김정은과 트럼프’라는 시뮐라크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6. 22.

지난 6월12일, 김정은과 트럼프의 역사적인 만남은 어쩌면 한반도에 70년간 지속된 냉전체제를 실제로 종식시키는 중대한 사건일지 모른다. 그것은 냉전의 울타리를 유지하려는 정치적 반복 퇴행술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냉전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기호가 아니었을까. 불행하게도 한반도 종전의 선언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기에 이 만남이야말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70년 동안 불가능했던, 완벽하게 서로 다른 두 체제의 만남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불과 올 초만 하더라도 이 둘은 핵을 매개로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막말을 서로에게 늘어놨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올 1월8일,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을 계속한다면 ‘화염과 분노’, 직설적으로 말해 세계가 본 적 없는 힘을 맞닥뜨릴 것”이라고 겁박했다. 김정은은 곧바로 트럼프를 향해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 이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응수했다. ‘로켓맨’ ‘자살미션’이라는 트럼프의 막말에 김정은은 ‘겁먹은 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늙다리’로 되갚았다. 힙합 신으로 비유하자면, 둘 다 말로 전쟁을 선포한 하드코어 래퍼 같았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오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극과 극은 통해서였을까, 살벌한 말싸움을 벌이고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로켓맨 김정은은 늙다리 트럼프와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만났다. 두 정상의 만남을 기다리는 미국의 성조기와 북한의 인공기는 흡사 자매국가처럼, 치명적으로 조화로운 색상과 디자인을 표상했다. 극단적 자본주의의 아이콘 트럼프와 극단적 전체주의의 아이콘 김정은의 만남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시뮐라크르의 이미지를 생산했다. 사실 강력한 두 체제를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두 아이콘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김정은을 상징하는 일명 ‘언더컷’으로 불리는 헤어스타일은 할아버지 김일성을 복제하고 싶은 열망을 담은 정치적 복제물이다. 사실 언더컷은 누구나 모방 가능하다. 그러나 인민복을 입고 고도비만조차 닮으려 했던 언더컷의 소유자, 김정은의 실제 캐릭터는 그 누구도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를 가진다.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생산하는 김정은의 이미지는 사실 현실에서는 복제 불가능한 복제물이다.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정치적 위치를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견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불가역적인 시뮐라크르의 최강자는 다름 아닌 트럼프이다. 트럼프의 금발 역시 김정은처럼 강력한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것이다. 건강 문제로 복용한 약이 탈모를 일으켜 그의 금발의 헤어스타일은 마치 모발이 풍성한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 김정은의 헤어스타일과 다른 점은 트럼프는 머리를 옆으로 감아올렸다는 점이다. 위장술로서 금발의 헤어스타일과 원색의 넥타이, 풍성한 양복매무시, 그리고 싼 티 나는 입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허영을 표상한다. 이는 그 누구도 복제 불가능한 복제물이다.

 

한때 인터넷에서 두 사람의 얼굴을 서로 바꿔치기하는 합성사진이 유행이었다. 극단적으로 서로 다를 것 같았던 두 사람은 합성, 즉 거짓 복사물을 통해서 둘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위해 얼굴을 서로 마주했다. 성조기와 인공기처럼, 복제 불가능한 두 복제물은 마치 다른 듯하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은, 똑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시뮐라크르이다. 냉정한 냉전의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이렇듯 순식간에 사건을 일으키는 비현실적인 두 시뮐라크르가 출현한 것이다. 아마도 지금 평화와 통일의 순간은 이 두 사람 같이 비현실적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사건을 가능케 하는 시뮐라크르의 영웅을 원했는지 모르겠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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