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한·일 문화 내셔널리즘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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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한·일 문화 내셔널리즘을 넘어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8. 16.

지난 8월4일, 일본 아이치트리엔날레2019 ‘표현의 부자유전(展) 그 후’에 출품된 김운성 작가의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 극우파들의 위협이 예상되어 관객의 안전을 위해 주최 측이 내린 불가피한 결정이란다. 


전시회의 주제는 이미 논란을 예고했다. ‘평화의 소녀상’뿐 아니라 일본이 금기시하는 일왕과 군국주의를 문제 삼는 작품이 주되게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의 중요함을 알리려는 전시회는 역설적이게도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허망하게 침해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 중단 사태가 갖는 특별한 점은 검열과 표현의 자유의 주체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다. 전시를 중단시킨 자는 누구인가? 


실제 전시 중단을 결정한 사람은 전시회 실행위원장을 맡은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이다. 그런데 오무라 지사는 애초에 이 전시를 승인한 사람이다. 반면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며 전시 중단을 오무라 지사에게 요구했다. 오무라 지사는 처음에는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 극우파의 테러위협이 가중되자 관객의 안전을 위해 전시 중단을 결정했다. 


나중에 오무라 지사는 이 결정이 일본 헌법 21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검열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일본 극우파들의 협박이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일본 정부가 예술제 보조금 삭감을 시사하며 전시 중단을 압박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 중단을 내린 실질적인 주체는 누구일까? 오무라 지사인가? 가와무라 시장인가? 일본 극우파인가? 아베 정권인가? 아니면 일본인들 그 자체인가? 오무라 지사가 실제로 전시 중단 결정을 내렸지만,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안에는 포스트 군국주의 욕망을 둘러싼 일본 내부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내재해 있다. 


이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자는 누구인가? 김운성 작가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검열을 당했다. 그 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한국의 박찬경, 임민욱 작가도 자발적인 전시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 중단 결정에 대해 일본 측 전시 실행위원들은 ‘평화의 소녀상’ 전시 재개를 요구하는 질의서를 오무라 지사에게 전달했다. 일본의 양심적인 문화예술인들도 이번 사태를 강력하게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의 38개 문화예술단체들도 일본의 끔찍한 검열 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자들은 비단 한국 작가들, 한국 문화예술인들만이 아니고 일본의 문화예술인들, 이번 전시에 참여한 72명의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다.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 보상을 확정 판결한 후에 곧바로 가해진 아베 정권의 경제보복 조치는 사실상 21세기 군국주의 부활의 욕망을 품은 정치적 조치이다. 이 조치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으로 이어지는 한·일 문화냉전의 대결구도로 이행했다. 


아베 정권이 노리는 것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네이션’,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세계 시민’ 사이의 대결을 조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21세기 군국주의 부활과 그 효과로서의 문화내셔널리즘을 재생산하는 문화냉전 세력들이다. 


검열은 일본이 했고, 표현의 자유는 한국이 지켰다라는 일방적인 문화내셔널리즘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안에도 검열의 주체들이 있고, 그들 안에도 표현의 자유의 주체들이 있다.


‘평화의 소녀상’ 사태가 주는 교훈은 아베의 포스트 군국주의가 재생산하려는 문화내셔널리즘을 경계하면서, 국경을 넘어 표현의 자유의 보편성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세계 시민의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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