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제민의 특파원칼럼]타인을 의식하기 시작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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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민의 특파원칼럼]타인을 의식하기 시작한 북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1. 19.

지난 9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도 문제가 많은 나라라는 비판을 수긍하며 퍼거슨이라는 소도시에서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뒤 사회가 분열된 것을 언급했다. 이어진 말은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검증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많은 미국인들이 공유하는 가치이다. 물론 오바마도 흑인 청년의 부모가 막상 유엔 인권이사회에 출석해 아들을 죽인 경찰관이 미국에서 불기소될 경우 유엔이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탄원했을 때에는 심사가 복잡했을 것이다. 퍼거슨 사건은 유엔 인권이사회의 다음번 보편적 정례검토(UPR) 미국편 보고서에 포함될 수도 있다. 이렇듯 지구상 어디에도 인권 문제에서 100%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하지만 18일 유엔 제3위원회에서 채택된 북한 인권 결의는 차원이 다르다. 내전과 같은 극한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 국가 정책 때문에 장기간 지속된 인권 악화가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 이르렀다는 국제사회의 판단이 내려진 것은 처음이다.

북한은 그러한 판단이 탈북자들의 편향된 주장에만 의존해 객관적이지 않은데다, 결의 도출 과정이 불평등한 국제 권력관계, 특히 미국의 배후조종에 기인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결의안 통과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유엔 총회 기간에 북한 인권 회의를 주최하는가 하면 이 문제를 대북정책의 우선순위로 올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편의적인 해석이다. 상당 부분 탓은 북한에도 있다. 10년 전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자리가 생긴 뒤 인권 실태조사를 위해 방북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릴 때마다 북한은 ‘인권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유엔 조사위원회(COI)가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최고지도자의 국제형사재판소(ICC) 기소 가능성이 제기되자 그제서야 특별보고관의 방북을 허용할 테니 객관적 보고서를 작성하자고 협상을 시도할 때는 늦은 감이 있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입장에선 억울한 느낌일 것이다. 지금 북한 인권 상황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유산의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북한이 인권 결의 채택을 구실로 핵실험으로 대응할 수도 있고, 미국·한국 등이 북한 체제 붕괴를 위해 인권 문제를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북한 사람들의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ICC에 서기까지는 많은 중간단계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미국도 해외에서 벌인 전쟁 과정에 일어난 미군의 민간인 사살에 대한 책임 추궁 등을 우려해 ICC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희망의 근거는 북한이 외부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평양, 제네바에서 뉴욕으로 차출된 북한 외교관들이 외국 외교관들을 상대로 국제사회의 ‘언어’로 설득하고, 아동권리협약 의정서를 비준하는 등 가능한 범위 내에서 국제 인권규범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느 한국 외교관은 “30~40년 전 우리 선배 외교관들의 일이 지금 북한 외교관들이 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러시아를 방문 중인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왼쪽)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오른쪽)과 20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시내 외무부 영빈관에서 회담을 갖기 위해 함께 걸어가고 있다. _ AP연합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위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정치범 김대중의 석방을 약속하기까지 미국 등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인권 압박은 수십년간 지속된 과정이었다. 한국 독재자들이 외부의 시선에 신경을 쓰면서 인권 개선의 여지가 생겨난 것과 같은 일이 북한에도 일어날지는 미지수다. 그러자면 적어도 인권 문제를 북한 체제 붕괴에 활용하려는 세력을 배제하고, 그런 확신을 북한에 심어줘야 한다. 한국과 미국 등은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 상호 왕래와 교류 등 유엔 COI 보고서의 다른 권고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무엇보다, 진정 강한 것이란 어떤 것인지 북한 지도자가 잘 이해하기를 기대한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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