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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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숙제와의 전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0. 4.

항저우 어린이들은 최근 ‘가을방학’을 얻었다. 그러나 방학과 동시에 학부모들에게는 기이한 숙제가 떨어졌다. 숙제 제목은 ‘다 같이 나무심기 릴레이’다. 중국의 카카오톡에 해당하는 웨이신에서 가상의 나무를 키우는 미니 게임이다. 원하는 종자를 골라 물을 주면서 나무로 성장시킨 후 이 나무 사진을 캡처해 담임 선생님에게 보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다. 웨이신 친구들에게 게임을 공유해야 종자에 계속 물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숙제를 완성하기 위해선 ‘다단계식 게임 영업’을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숙제는 그대로 부모의 숙제가 된다. 복잡한 첨단 숙제에 학부모들만 바빠졌다.

 

사실 이 게임은 항저우의 유명 호수인 시후의 안전, 홍수 방지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공익 광고성 프로그램이다. 학부모들은 “어려운 건 둘째치고 이 숙제가 어떤 교육 효과가 있냐” “정부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일부러 아이들이 하기 어려운 숙제를 내 학부모들을 동원한 게 아니냐”고 항의했다. 해당 교육청은 “캠페인을 알릴 목적의 숙제인 것은 맞지만 강제성은 없다”고 해명했다.

 

중국 교육 당국은 관련 규정에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없어 학부모들이 대신해야 하는 숙제는 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론 학부모도 어려운 ‘황당 숙제’가 넘쳐난다. 이상한 사람이나 기이한 사건을 뜻하는 ‘치파’라는 단어를 써서 ‘치파 숙제’라고 부른다. 매년 치파 숙제 문제가 제기돼 왔지만 올해는 질적, 양적으로 압도적이다. 중국 학부모들은 숙제와의 전쟁 중이다.

 

광둥성 불산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쌀알 1억개를 세어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선생님은 학부모들이 있는 단톡방에 “오늘 1억개의 쌀을 세어오는 산수 숙제가 있으니 아이들이 숙제를 할 수 있게 독려해 달라”고 공지했다. 쌀알을 다 센 후 다음날 학교에 가져오라고도 했다. 1억개라는 말에 놀란 한 학부모가 “그걸 어떻게 세냐”고 묻자 교사는 “한 알씩 세면 된다”고 했다.

 

1초에 3알씩 센다고 가정하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꼬박 1년간 세어야 한다. 600개 쌀알이 50g 정도이니 1억개 쌀알을 학교까지 운반하기란 ‘미션 임파서블’이다.

학교 측은 억이라는 숫자의 개념을 알게 하기 위한 숙제였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론 교

 

사조차 쌀알 1억개의 부피와 무게를 모른 채 내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치파 숙제 사례는 끝도 없다. 유치원생들에게 파워포인트로 발표자료를 제작해 오라는 숙제를 비롯해, 부모와 함께 교정을 찬미하는 시 지어오기 같은 숙제가 있다.

 

학부모에게 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보고 매주 1만자 이상의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준 학교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국 학부모들은 쥐잡기, 파리잡기 등 1960~1970년대 구시대 숙제 행태에서 나아진 게 없다고 한숨을 쉰다.

 

무리한 과제뿐 아니라 과도한 학부모들의 욕심도 문제로 꼽힌다. 한 학부모는 한 달간 보이는 달 모양의 변화를 그려오라는 자녀 숙제를 대신 해주다 4㎏이나 줄었다는 글을 올렸다 뭇매를 맞았다. 자연 관찰 숙제는 아이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데 학부모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다. 이 학부모는 아이가 시킨 대로 매일 밤 12시의 달 모양을 관찰해 스케치했다고 한다. 당초 숙제에는 몇 시의 달을 그려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다.

 

아이들의 호기심, 탐구심과 함께 학습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 숙제의 본래 목적이다. 무엇보다 학생 스스로 해냈을 때 이런 효과가 나온다. 형식에 치우쳐 학생들이나 학부모를 괴롭히는 치파 숙제는 좋은 숙제라고 할 수 없다. 참신하기만 하고 기준이 없으면 숙제는 수수께끼일 뿐이고, 숙제와의 전쟁도 끝나지 않는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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