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끝나지 않을 라미레스 가족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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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아침을 열며]끝나지 않을 라미레스 가족의 여정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7. 1.

중남미 온두라스 소년 엔리케는 다섯 살 때인 11년 전 미국으로 돈을 벌려고 간 엄마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과테말라를 지나 멕시코에서 화물열차에 매달려 북쪽으로 향했다. 화차는 위험천만하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지붕 위는 당국의 단속, 갱단의 약탈에 노출돼 있다. 이를 피하려다 열차 아래로 떨어지거나 일부러 뛰어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굶주림, 더위, 갈증, 경찰, 강도, 갱…. 엔리케는 지나는 길 내내 위험에 맞닥뜨렸다.


엔리케는 멕시코 북동부 접경지역인 누에보라레도에서 밀수업자에게 1200달러를 주기로 하고 국경을 넘었다. 겉으론 얌전해 보이지만 소용돌이치는 리오그란데강을 건넜다. 미국 텍사스주에 들어온 엔리케는 밤에 사막을 걸었다. 국경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다. 사막의 낮기온은 50도에 육박하지만 밤은 추위와의 싸움이다. 그는 결국 122일 만인 2000년 9월 미국 남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엄마를 만났다. 엔리케와 두 살 위 딸 벨키를 온두라스에 두고 온 엄마 라우데스는 보모와 냉동생선공장 직원으로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이 온두라스에서 잘 먹고, 잘 입고, 공부도 해서 잘 지내기를 기대했겠지만, 아들은 엄마를 그리워했다.


엔리케의 온두라스 집에서 노스캐롤라이나까지 4800㎞ 떨어졌다. 엔리케는 멕시코 당국에 붙잡혀 남부 과테말라 국경으로 돌려보내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느라 실제 이동거리는 총 1만9300㎞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평양에서 베트남 하노이까지 기차를 타고 간 거리가 3800㎞, 중국 공산당이 1934년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2년 동안 산시성까지 이동한 대장정이 1만2000㎞다. 엔리케가 홀로 감내해야 했던 험난함은 짐작 이상이다. 엔리케 이야기를 취재해 2002년 LA타임스에 보도하고, 2006년 <엔리케의 여정>이란 책으로 펴낸 소니아 나자리오는 엔리케가 미국에 있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매년 길을 떠나는 중남미 소년 4만8000명 중 한 명일 뿐이라고 했다.


엘살바도르 출신 25세 라미레스는 21세 아내, 23개월 된 딸 발레리아와 함께 미국행에 나섰다. 지난 4월3일 산마르틴을 떠나 6월23일 멕시코 국경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는 합법 대신 리오그란데강을 건너는 불법을 선택했다. 라미레스와 발레리아는 강의 빠른 물살에 휩쓸려 주검으로 떠올랐다. 그의 여정은 81일 만에 끝이 났다.


라미레스 부녀의 사진은 중남미 이민자들의 현실을 비극적으로 보여줬다. 2015년 9월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3세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를 연상시켰다. 쿠르디 가족의 비극은 유럽을 움직여 영국 등이 시리아 난민 수용에 대해 문을 열었다. 얼마 가지 못했다. 반난민 정서가 유럽을 휘감으면서 지중해상에서 표류하던 이민자들이 구조선에 올라타도 닻을 내릴 곳이 거의 없다.


엔리케와 라미레스의 비극은 19년 차이로 벌어진 일이다.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은 더 많은 이들의 미국행을 재촉한다. 트레일러에 몸을 싣거나 따라 걷는 캐러밴 행렬, 미국 국경지대에서 국경수비대에 몸수색을 당하는 엄마 앞에서 울고 있는 온두라스 소녀, 리오그란데강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손에 손을 잡고 건너는 이민자들과 같은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민자들에게 상황은 점점 열악해진다. 그 앞에 트럼프 대통령이 있다.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를 2020년 재선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핵심 공약은 이번에도 반이민이다. 그는 “갱단”과 같은 이민자들의 “미국 침략”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재선 출정식날인 6월18일 “불법체류자 수백만명을 ‘제거’할 것이다. 그들이 미국에 들어온 속도만큼 빠르게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인종차별주의자, 반이민 강경파를 이주민 담당 주요 보직에 잇따라 발탁한 것은 대선까지 어떻게 하려고 할지를 웅변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말은 가당치 않은 소리다. 그 자신이 독일 이민자의 2세이지만 미국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저 가난한 이민자는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데 있어 불순물일 뿐이다. 국경에서 벌어지는 인도주의적 위기로 인해 반이민 정책에 대한 성토가 빗발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오불관언이다. 미국의 남부 국경을 맞댄 멕시코에 이민자들이 못 들어오게 하라며 관세 부과를 겁박해 단속을 강화하도록 했다. 중남미 이민자의 미국 가는 길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식으로 좁아진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일은 늘어난다. 제2, 제3의 라미레스 가족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안타까움만 가득하다.


<안홍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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