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덩샤오핑의 길, 김정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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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아침을 열며]덩샤오핑의 길, 김정은의 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5. 2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중국의 천지개벽을 이끌어낸 덩샤오핑 같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비핵화를 통해 개혁개방에 적극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이 같은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상당 기간 안개 자욱한 시간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지만 북한이 중국과 체제 동질성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은 김 위원장이 간과할 수 없는 롤모델임에 틀림없다.

 

덩샤오핑은 청년 시절 프랑스 유학, 대장정 참여를 거쳐 군·지방정부·외교 등 다방면에서 경험을 쌓은 뒤 70세가 넘어 최고 지도자가 됐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실각, ‘광야의 경험’을 거치며 자신을 단련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 역시 해외 유학 경험이 있고 절대 권력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과 일부 공통점이 있다.

 

그가 향후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점치기엔 아직 시기상조란 의견이 많지만 덩샤오핑은 덩샤오핑이고, 김정은은 김정은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교훈 삼아,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린다면 북한식 모델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모든 건 그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다.

 

중국 개혁개방 원년인 1978년 10월 미국 GM이 중국 정부와 자동차 생산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 토머스 머피 GM 단장은 중국 측과 협상에서 합자 형식을 제안하며 자신의 지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중국 인사에게도 지갑을 꺼내달라 요구했다. 이어 합자란 양측이 낸 돈을 합해 기업을 경영하되 이익이 나면 나누고, 손해가 나면 함께 부담하는 형태라 설명했다. 중국 측 인사는 “어떻게 공산당과 자본가가 손을 잡는단 말인가”라며 일단 거부한 채 덩샤오핑에게 보고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합자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허락했고, 중·외 제조업 협력의 물꼬를 텄다. <중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움직이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이 개혁개방에 나설 때 최고 지도자의 결단력과 예지가 그만큼 중요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덩샤오핑은 공산당이 독단과 극단주의에 빠지면 반드시 실패하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취할 때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0년대 내내 보수파 반발에 직면했지만 남순강화로 돌파했으며 때로는 보수세력과 타협하고, 심지어 관료들의 부패를 일정 부분 용인해가며 개혁동력을 이끌어냈다. 만약 김 위원장이 덩샤오핑과 같은 결단력과 유연성을 보여준다면 북한의 개혁개방은 힘차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에 본격 나설 수 있었던 데는 대외환경 개선도 크게 작용했다. 1972년 일본과 수교했으며 미국과는 1979년 국교정상화를 이뤄냈다. 다음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개혁개방에 중대한 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은 1978년 11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연결해 대륙으로 확대하는 점→선→면 전략을 취했다. 북한도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개혁개방을 추진하려는 태도를 취했지만 과단성 있는 조치를 내놓진 못했다. 심각한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의 경제적 지원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시장경제체제 도입에는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말 현재 북한에는 중앙급 경제특구 5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19개가 지정돼 있다. 1991년 나선경제무역지대를 특구로 지정한 후 2000년대 들어 개성, 금강산, 신의주, 황금평·위화도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지역별로 중복지정되는 등 종합적 계획하에 추진된 건 아니다. 예컨대 신의주 인근에는 황금평·위화도경제특구, 신의주경제특구, 압록강경제개발구가 지정돼 있다. 시장을 대하는 기본 입장에서 중국과 달랐고 제도적 뒷받침도 미흡했다.

 

물론 북한과 중국은 다르고, 덩샤오핑의 전략이 흠결이 없는 건 아니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로 제한된 지역에서 실험을 거친 뒤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이 가능하나 북한은 특정 지역에 국한해 개혁개방을 실험하기가 쉽지 않다. 체제동요에 대한 지도층의 불안감도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누구든지 부자가 되라”는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은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큰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이루고 생존과 발전을 위해 거대한 실험에 적극 나선다면 주변국들은 아마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2500만명의 내수시장과 중국 동북3성 및 유라시아 대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인 북한의 경제적 가치는 이미 충분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산이라면 덩샤오핑은 길에 비유된다. 김 위원장이 북한의 길이 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오관철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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