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극복해야 할 3개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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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정동칼럼]극복해야 할 3개의 악마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5. 18.

남북의 두 정상이 판문점선언에 합의하고, 6월12일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라는 구체적 사항에 대한 합의 여부가 중심에 놓여있지만 기저에는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국제정치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스케일과 스피드로 역사 대변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급작스럽게 열리다보니 기대감도 상승하지만, 놀라움은 물론이고 생경함과 불안감까지 동반되는 것이 사실이다. 변화의 국면에 도사린 3개의 악마는 성공적 결말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살얼음 같은 아슬아슬함을 주고, 실패를 예측하는 이들에게는 의심의 근거를 주며, 그리고 성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첫 번째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그 유명한 ‘악마’다. 중요한 일에서 실패는 작은 것에서 나온다거나 또는 합의나 계약에서 세부조항 때문에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는 함정이 있을 때를 비유하는 이 표현은 진부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지만, 여전히 강력한 제동력을 가진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니 돌다리도 두드려봐야 하고,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로 무게를 싣고 있는 이유다.

 

한반도 분단체제로 인한 적대관계 70년과 북핵 위기 사반세기로 말미암은 불신의 구조화는 언제든지 디테일의 악마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일괄타결의 빅딜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물론이고, 합의 이후의 실행과정에서 디테일의 악마는 순간순간 위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따라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그러나 숨어있는 악마와 숨어든 악마는 구별해야 한다. 악마가 디테일에 숨은 것인데 문재인 정부가 찾지 못하는 것이라면 무능이겠지만, 권력보존이라는 사익을 위해 평화의 역사를 바꾸는 일을 방해하는 일부세력들은 디테일에 숨어든 악마다. 디테일이 원칙과 목표를 흔들지 못하도록 치밀함과 유연함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어든 악마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게 가속도를 올리는 것도 필요하다.

 

두 번째는 상대방을 악마로 모는 것인데, 특히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악마화가 가진 문제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 사회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유산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미국 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극도의 대북 불신에다 자국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더해지면서 실패를 예단한다. 미국 내 뿌리 깊은 도덕적 근본주의는 외교적 협상을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다. 악마와는 협상할 수 없고, 협상은 오직 적이 굴복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북한의 이례적인 선제적 양보조치들을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으로 해석하지 않고, 도리어 합의에 대한 조건의 문턱을 높이고, 골대를 뒤로 물리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회고록의 말미에서 미국대외정책의 최대 문제점을 ‘악마화 전략’이라고 규정하면서, 특히 북한에 대해 왜 그렇게도 혹독하게 대하는지, 악의 축 같은 심한 용어를 사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만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악마는 관성이다. 한번 경로가 정해지면 그것이 아주 부조리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경로의존의 기성질서가 변화를 거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른바 물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70년 냉전 및 분단체제를 살다보니 뿌리 깊은 관성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전쟁가설>로 유명한 역사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현재 시점의 결과가 미래의 시점에서 가능한 결과를 제약하기 때문에, 변화보다 현상유지를 고집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혁명이 일어나기 힘든 것인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보다, 익숙해진 현재의 고통을 참는 것을 택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디테일의 악마, 상대에 대한 악마화, 그리고 관성의 물귀신을 극복해야만 분단체제는 해소되고 평화의 시대가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70년 묵은 엄청난 불신구조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그것도 단기간에 만들어내야만 변화가 가능한 기막힌 역설이 놓여있다. 북한은 30여년에 걸쳐 전력을 쏟아 개발한 핵을 포기해도 체제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미국은 그런 핵을 북한이 정말 포기했다는 신뢰가 매우 짧은 시간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실패해서는 안될 마지막 기회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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