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후보든 다 그럴싸한 공약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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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어느 후보든 다 그럴싸한 공약은 있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22. 2. 25.

대통령 선거에서 외교안보 분야의 현안은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실생활과 직접 연관된 이슈가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체감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외교안보 문제는 선거가 끝난 다음날부터 냉혹한 현실로 다가온다. 국내 정치적 사안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뿐이지만 외교와 안보 문제는 국가 운명에 영향을 준다.

앞으로 12일 뒤면 누군가는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으로 외교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시점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첨단기술 선점 경쟁으로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로 동북아시아 안보지형이 꿈틀거리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북한·중국·일본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고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적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새로운 대통령은 이 같은 전대미문의 국제적 환경 속에서 5년 동안 한국 외교를 책임져야 한다.

외교안보 문제는 가장 견해 차이가 큰 분야인 것처럼 인식되지만, 당선이 유력한 후보 2명의 공약은 강조점과 표현 방법이 다를 뿐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후보는 모두 동맹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인 중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핵화에 대한 입장과 남북 대화의 중요성, 한·일관계 개선 필요성을 말하는 것도 같다. 공약만으로는 누가 나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형편없는 성적표를 남긴 과거 정부들도 공약만큼은 다 훌륭하고 화려했다.

물론 공약은 중요하다. 원칙과 방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공약을 만들면서 국정운영 계획을 수립하고 고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공약이 실제 정책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외교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공약이 아니라 천변만화의 실제 상황에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탁상공론과 공허한 이념, 국내정치를 의식한 허장성세는 외교 각축장에서 벌어지는 실전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누구에게나 다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링에 올라가 얼굴을 얻어맞기 전까지는…(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ot punched in the face)”이라는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은 냉엄한 외교무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외교의 미래는 누가 집권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집권한 뒤 외교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계획보다 실행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혼돈의 국제질서 속에서 국익과 국가 정체성을 지키고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려면 누가 집권하든 꼭 필요한 일이 있다. 외교안보 문제를 초당적으로 다루고 전문성을 갖춘 인물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다. 실력 위주의 ‘초당적 인재 등용’과 ‘일관성 있는 정책’이 자리 잡지 못하면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대전환의 시대를 절대 헤쳐나갈 수 없다.

한국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외교에서의 정파적 성향이 강하다. 정권이 교체되면 전 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은 모두 배제된다. 실력과 무관하게 진영 논리와 정치적 배경에 따라 요직이 채워지고 정책은 정권의 코드에 맞게 재편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외교는 견고하게 진영화·정치화됐다. 정권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관료·전문가들은 사라지고 ‘정권과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있음을 내세우는 사이비 전문가, 낡은 이념과 대중영합주의에 의존하는 정치인들이 외교를 주무른다. 세계 주요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유독 외교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다. 이들에게 대선은 ‘줄만 잘 서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로또다.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것이 권력자의 본분이지만 현재 한국의 대선 구조에서는 이게 가능하지 않다. 제갈공명과 같은 인재가 아무리 많아도 이들이 선거 전에 미리 캠프에 몸을 싣고 후보와 지근거리의 문고리를 잡지 못하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 두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을 세세히 숙독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공약에서 차이점을 찾아내려 애쓰고 싶지 않다. 그런 것보다는 외교안보 문제에서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고 설령 상대 캠프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라도 필요하다면 중히 쓰겠다고 약속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에게 표를 주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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