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모의 외교포커스]다시 ‘고난의 행군’ 시작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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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유신모의 외교포커스]다시 ‘고난의 행군’ 시작한 북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0. 6.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냉전 종식과 소련·동구권의 몰락, 중국의 개혁·개방 등 국제환경이 급변하고 김일성 주석 사망, 경제난 심화 등으로 체제가 위기에 봉착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펼친 대중 노력동원 캠페인이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서 외부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을 주창했다. 북한은 이 시기를 거쳐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지금 북한에서 핵무기는 선군정치를 통한 강성대국의 상징이며 김정일 정권의 가장 큰 위업으로 간주된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은 2000년대 초반에 끝났다. 하지만 북한은 지금 ‘제2의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고 있다. 이번 행군은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개발에 성공한 핵무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다. 북한은 이를 ‘핵·경제 병진 노선의 추구’라고 표현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국제법상 엄연한 불법이므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수반한다. 북한이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이 제재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는 곧 핵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고 제재를 벗어나려 한다.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예외를 인정받아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 목표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란 ‘불법적으로 핵무장을 했지만 제재는 받지 않는 나라’를 뜻한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국과 우호적 여건을 조성하고 국제사회가 자신들의 핵무장을 묵인하도록 해 제재를 완화시켜야 한다. 북한이 지금 핵을 갖지 않은 여타 국가처럼 행동하면서 국제사회와 접촉면을 넓히고 외교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자신들의 핵보유를 국제적으로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장기 전략에 따른 것이다.

북한이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목표로 설정하고 각종 대남 성명을 통해 지속적으로 남측에 대화를 제의하고 있는 것도 핵·경제 병진 노선의 일환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남북관계 개선은 핵·경제 병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직접적인 경제 협력을 유도할 수 있고 남북대화를 매개로 미국의 관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한·미가 주도하는 국제 대북제재의 균열을 노릴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북한이 지난 4일 황병서·최룡해·김양건 등 권력 핵심 실세들을 대거 남측에 보낸 것은 핵·경제 병진을 위한 대남 전략의 결정판이다.

북핵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요구하는 박 대통령 (출처 : 경향DB)


북한의 전략은 무모해 보인다. 한·미는 물론 중국·러시아도 북한의 핵보유에 반대한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이미지는 막무가내식 불법 핵무장국,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권탄압국으로 각인돼 있다.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미국은 공공연히 “핵·경제 병진 노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 말 속에는 “실패하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제2의 고난의 행군은 1차 때처럼 비참하지는 않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훨씬 낮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나라는 단연 한국이다. 남북 간 긴장 완화와 동질성 회복을 위해 북한과 대화하고 교류를 넓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고 주민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지지해줘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움직임들이 궁극적으로 핵보유를 인정받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그렇다고 대화를 거부하고 핵포기만을 주장하는 것은 북한의 핵보유 정당성만을 강화시켜 준다.

지금 한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한반도 평화·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북한을 핵포기로 유도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안고 있다. 다른 어떤 나라도 대신해줄 수 없는, 한국이 처한 가장 시급한 외교과제다.


유신모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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