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권리, 입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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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입을 권리, 입지 않을 권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4. 18.


프랑스에서 부르카의 공공장소 착용 금지법이 시행되던 날,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부르카에 갇혀 장님처럼 남편의 손을 붙잡고 관람하던 한 여인을 목격했다. 멀쩡하게 서양식으로 차려 입은 남편의 모습은 검은 베일에 둘러싸인 여자의 모습과 극한 대조를 이루었다. 순간,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감옥이었다. 제국주의가 일궈낸 전리품들의 오만한 전시장이라 할 만한 그 호화롭기 그지없는 공간에 등장한 부르카 두른 여인의 모습은 묘한 잔상을 남겼다. 세상 모든 나라들을 대영제국의 휘하에 거느리고 그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려는 제국주의, 여자를 한 남자의 감옥에 가둔 채 나머지 세상과 차단하려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이슬람 경전 코란은 여성에게 몸 전체를 가리는 옷을 입을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부르카를 비롯하여 여성의 몸을 가리게 하는 옷은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남성을 성적으로 탈선하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극성스러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부장제와 이슬람교 결합의 산물이다.나라 전체에 2000명이 채 되지 않는 적은 숫자가 착용한다는 이 부르카를 못 입게 하려고 온 언론과 정치권이 이토록 큰 소란을 떠는 것은, ‘오로지’ 득세 중인 극우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집권여당의 정치적 계산이었을 뿐. 지난달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극우정당 국민전선(FN·14%)은 집권당 대중민주연합(UMP·15%)을 1% 차이로 추격했다. 그토록 열심히 FN을 따라했건만, 사르코지의 UMP는 끝을 모르는 하락을 거듭하고 있다. 진심 없는 여성인권 옹호, 안전상의 문제, 정교분리의 원칙을 들먹이며, 실은 이슬람 혐오를 드러내 보여 표를 사려 했던 집권당의 계산은 빗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리에서 처음 부르카를 보게 된 것은 런던에서 파리에 돌아온, 그러니까 부르카 금지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직후였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68의 슬로건은, 여전히 프랑스 정신의 한복판을 관통한다. 가녀린 작은 몸매의 여인은 빠르고 당당한 걸음으로 부르카를 휘날리며 거리를 걷는다. 남편과 종교 공동체에 의한 억압이 부르카를 더 이상 강요할 수 없게 될 때, 부르카는 거대한 선글라스를 걸치는 기분 혹은 간혹 외계인이 되어보고 싶은 심정에서 입을 수 있는 엽기 패션 아이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남이 벗으라고 하는 건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신라호텔에 한복을 입고 가서 입장을 저지당한 이혜순씨 사건에 온 국민이 이토록 열렬히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삼성이란 제국주의적 기업이고, 한복이라는 우리 옷에 대한 거부였기 때문이었을 테지만, 옷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하는 수치심을 인터넷을 통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적어도 2009년부터 적용되어 왔던 한복금지규정에, 그 동안 이 삼성이란 사대주의적 권위에 눌린 고객들이 수긍해 왔다는 사실이다. 마치 한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자, 비로소 모두가 그 사실에 대해 임금을 비웃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젠 모두가 신라호텔의 행태를 크게 비난한다. 이슬람혐오증을 퍼뜨려서 표 좀 모아 보려는 자가 강제하는 부르카 벗기기가 아니라, 이슬람권 여성이 부르카를 강요하는 원리주의자들의 코밑에 코란을 들이대며 그것을 입지 않을 권리를 말할 때, 비로소 부르카는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용기있는 자가 큰 소리로 진실을 말할 때, 한순간 암흑의 세계는 환한 빛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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