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정치 쇠퇴’ 두고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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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정치 쇠퇴’ 두고 볼 것인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0. 2.

미국의 ‘정치 쇠퇴(decay)’를 놓고 워싱턴의 논쟁이 뜨겁다. 포린어페어스 최근호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미국의 쇠퇴’란 제목의 논문에서 미국 정치제도는 이익집단에 포획되고 사법에 대한 과잉의존으로 법률가에게 지배되는 속에서 정치인들이 서로 발목을 잡는 거부권 정치(vetocracy)가 횡행하여 쇠퇴를 거듭하고 있으며 향후 출구는 없다고 단언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정치가 민주, 공화 양대 정당 간 대결로 종종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경고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후쿠야마의 논란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패권 혹은 제국의 쇠퇴 논쟁과 연결된다는 데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본격화된 미국 쇠퇴론 공방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미국 쇠퇴론을 긍정하는 입장은 미국 경제의 상대적 하락과 중국 및 아시아 경제의 부상,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 지위 축소, 특히 아·태 지역에서 중국 군사력의 급격한 신장 등을 지목하면서 미·중 백중시대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임을 예단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부정론은 지식기반 미국 경제의 경쟁력과 고등교육기관의 수월성, 가치와 규범 제정력 등 소프트파워, 네트워크파워 등을 강조하며 미국 패권의 지속성을 주장하고 있다. 향후 세상은 미·중 간 세력전이 펼쳐지기보다는 다양한 비국가행위자로 세력분산(diffusion)이 일어날 것이며 미국의 지도력은 여전할 것이라 본다.

이 논쟁에서 최근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은 미국의 거버넌스 능력을 비관적으로 보는 정치 쇠퇴론이다. 미국의 정치제도는 새로운 환경 대처에 적절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거나 기존 제도의 기득권층이 변화를 거부하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정향이 이념적 양극단으로 쏠리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처럼 권력분립이 확립되고 양원제를 운영하는 경우 양대 정당 간 합의 없이는 의회의 주요 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양당의 이념화된 지지층이 과거 10년간 각각 20% 전후로 증가하고 중간층이 10% 축소되는 등 정치적 양극화는 주요 정책결정을 지연시키거나 좌절시키는 주요인으로 작용해왔다. 112대 의회(2010~2012)의 경우 주요 이슈 중 무려 75%가 의사결정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정치 쇠퇴, 위기의 오바마 대통령 (출처 : 경향DB)


양극화에 따른 정파적 대립에 외교정책적 자율성의 공간도 좁아지고 있다. 중동이 미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며 유럽 질서를 흔들고 있으며, 테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도 미국은 우유부단하고 유화적 태도이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 위협을 배증해도 ‘아시아 재균형’과 ‘전략적 인내’란 수사만 반복할 뿐이다. 민감한 국내 이슈를 놓고 양극화된 정치엘리트들이 서로 비난게임(blame game)에 몰두하는 속에서 일반 국민들의 외교정책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저하되고 있다. 결국 미국의 문제는 군사력과 경제력 등 가용자원의 쇠퇴라기보다는 이를 정책으로 전환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능력의 쇠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쇠퇴는 남의 일이 아니다. 세력균형 정치가 전개되는 동북아에서 중국은 패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공세를 펴고 있으며 일본도 신속히 전열을 재정비, 전방위로 뛰며 대항하고 있다. 북한 역시 조기붕괴설을 잠재우고 만만찮게 도사리고 있다. 성장동력 감퇴, 소득불균형과 저출산 고령화의 급진전으로 사회적, 경제적 활력이 저하되고 있는 한국은 대외적으로도 화려한 수사를 넘는 전략적 결 단과 추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미국보다 더 깊은 정치 쇠퇴 때문이기도 하다. 제왕적 대통령제, 지역할거주의, 취약한 정당체제, 타협거부 문화 등의 폐해와 함께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의회정치가 황폐화되었음은 세월호 참사 5개월이 웅변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권의 장외정치, 반목정치로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스스로 양극단의 한편에서 대립의 주역이 되어 있다. 정치양극화로 배제된 다양한 중간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타협과 합의를 가능케 하는 유연한 정치제도를 설계하기 위해 정치인들이 분골쇄신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쇠락을 막기 어렵다.


손열 | 연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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