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통일 논의를 새롭게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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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통일 논의를 새롭게 시작하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5. 28.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서 채택이 불발된 뒤 남북관계의 교착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4월11일 한·미 정상회담 때 합의에 따라 우리 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을 결정했지만, 북한매체들은 우리 정부가 근본 문제를 제쳐둔 채 인도주의 지원과 교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면서 생색내기라 비난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제재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장기전에 대비하며 대화 재개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리용호 외무상은 비핵화의 상응조치로 부분적 제재 해제 문제를 꺼내든 이유를 미국이 아직 안전담보와 같은 근본 문제를 다룰 준비가 안됐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제재 해제 문제 따위에는 이제 더는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북한이 말하는 근본 문제란 무엇인가. 주한미군도 근본 문제의 하나지만, 금년 1월 김영철 부위원장이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더라도 주한미군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최근 북한매체가 거론하고 있는 경성안보 현안은 한·미 군사연습 문제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관계정상화 같은 연성안보 문제도 있지만 이는 남북 간만의 직접현안은 아니다. 


근본 문제와 관련된 남북 간의 현안으로 9·19 군사합의서 이행과 같은 경성안보 문제가 있다. 아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도 안됐고, 북한의 단거리미사일 시험이나 군사분계선 일대를 벗어난 군사훈련은 새로운 쟁점이다. 당장 대북 제재가 계속되어 교류·협력이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적대하는 법제도 개정을 논의하거나 통일방안을 논의하는 것은 연성안보를 풀어가는 의제가 될 수 있다.


우선 주목되는 연성안보의 근본 문제는 통일방안에 관한 논의이다. 올해 1월1일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적극 모색”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1월23일 정부, 정당, 단체연합회의 명의의 호소문도 통일방안의 모색을 촉구하였으며, 재일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사상과 제도, 지역과 이념, 계급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여 겨레의 의사와 이익에 맞게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해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남북은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때 발표한 ‘6·15공동선언’에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고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남북이 논의하는 대신 이명박 정부는 ‘3대 공동체(통일)방안’을 내놓고 통일항아리운동을 벌였으며,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론에 이어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북측은 흡수통일을 꾀하는 제도통일론이라고 반발하며 핵·미사일 개발을 촉진하는 명분의 하나로 삼았다. 이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가진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정권의 교체나 붕괴를 원하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통일을 가속화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담긴 ‘대북 4No정책’을 표명한 것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작년부터 남북합의나 대북제안을 통해 우리 측 통일 구상을 하나씩 구체화해 왔다. 4·27판문점선언에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키로 한 데 이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상호대표부 교환을 제안했다. 9·19군사합의서에서 군사공동위원회 설치에 합의하였고 금년 3·1절 기념사에서는 경제공동위원회를 제안했다. 군사, 경제에 이어 문화, 보건의료, 과학기술 등 부문별로 공동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잘 운용된다면 남북은 사실상 협의체적 공동정부의 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평화체제와 경제공동체의 토대 위에 남북연합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현실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이처럼 연성안보 의제인 통일방안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대북 제재로 꽉 막힌 국면을 돌파해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북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화로 이끌어낸다는 점 외에 지금 전개되고 있는 평화공존의 노력이 자칫 분단고착화 분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 대통령도 인위적으로 통일을 가속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듯이, 새롭게 통일 논의를 시작한다는 것과 조급하게 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민간 차원에서 먼저 논의를 시작한 뒤 어느 정도 공감대가 마련되면 정부가 이를 공론화하면 된다. 북측은 전민족회의를 우선적으로 개최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되, 체제 차이나 사안의 장기성을 고려해 우리 내부의 논의를 수렴하는 것에서부터 단계적인 접근이 바람직하다.


<조성렬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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