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연 칼럼]‘대북 망치’ 볼턴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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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호연 칼럼]‘대북 망치’ 볼턴의 퇴장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9. 18.

‘슈퍼 매파’ 존 볼턴의 경질이 한반도와 주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미국이 패권국가라 해도 고위인사 한 사람이 물러났다고 국제 정세나 특정 국가의 기본 입장이 달라지기는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볼턴이 누구인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내에 자리잡은 근본주의자 아닌가. 미국 매파는 볼턴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와 의지를 트럼프에게 전달했다. 더구나 볼턴은 매우 강한 성격이다. “볼턴은 망치이고 모든 것을 (때려 박아야 할) 못으로 본다”(인디펜던트)는 평가가 잘 말해준다. 그는 시리아, 이란, 북한에 대한 강경정책을 주도했으며, 자기 의견 관철을 위해 트럼프와도 격렬하게 싸우는 터프가이였다. 지난해 3월 트럼프가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을 때 관련 당사국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남북한은 우려했고, 일본은 환영했다. 볼턴이 경질된 지금 상황은 정반대다. 기상 용어로는 ‘문재인 대통령 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화창, 아베 신조 총리 비’로 표현할 수 있겠다. 문 대통령에게 볼턴 하차와 북·미 대화 재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멈춰서 있던 한반도 평화 시계가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우연한 행운은 아니다. 과거 뿌려놓은 북·미 대화의 씨앗이 움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의 공세가 위축되는 효과는 덤이다. 볼턴이 지난 7월 방한 때처럼 정부 당국자들보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와 먼저 만나는 의도적인 외교적 무례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장기화되는 한·일 갈등과 남북관계 교착에 ‘조국 사태’까지 3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는 문 대통령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질지 모르겠다.


지난 2월7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여성들의 글로벌 개발과 번영’ 이니셔티브에 서명하는 모습을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 _ 로이터연합뉴스


김 위원장은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북 주민 앞에서 핵담판 성공을 장담했지만 그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면서 구겨진 체면을 살릴 계기가 마련됐다. ‘하노이 노딜의 치욕’을 만회할 기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94년 북핵사태 이후 25년간 악연을 쌓아온 “인간오작품 볼턴”(북 외무성 대변인)의 퇴장이 반가울 것이다. 볼턴은 북한 정권 붕괴를 선호하고, 북한이 거부하는 ‘리비아 모델’을 고집한 데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배후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피인물을 경질하라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리비아 모델 폐기도 시사했으니 기쁨 2배다. 미국이 빅딜 대신 ‘다른 셈법’을 들고나올 것으로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는 나쁜 소식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전략적 레버리지가 대폭 약화될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북·미 협상이 성공하면 북한은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에 대한 미국의 버퍼링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 가뜩이나 중국의 부상과 트럼프 행정부의 아시아 전략 모호성으로 인해 일본의 존재감이 위협받던 차다. 여기에 협력적 연대 속에 미 행정부를 연결해온 볼턴마저 실각했으니 우려 위에 우려가 쌓이는 격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환경 변화가 아베 총리가 야심차게 전개해온 ‘문재인 때리기’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때리기는 과거사 갈등이 촉발했지만 기저에는 일본의 전략적 이익을 위협하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흔들어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평화 무드를 조성하는 문재인 정부는 일본 옆구리에 박힌 가시”라는 미국 정치학자 조지 프리드먼의 분석이 정곡을 찌른다. 돌아보면 아베 총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후해 한국 정부에 한·미군사훈련 재개와 대북제재 강화를 요구했었다. 한·일 사이에 과거사 갈등이 불거지기 전의 일이다.


한반도 정세 기상도는 변화가 심하다. 어제는 화창해도 오늘은 비가 쏟아질 수 있다. 꼼꼼히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문 대통령은 북·미 협상의 중재자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그동안에는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관계 진전으로 이어졌지만 이제는 북·미 협상의 진전이 남북관계 진전으로 연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김 위원장은 절박한 심정일 것이다. 기피인물도 사라지고 리비아 모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이번 협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 정세를 기획한 트럼프 역시 부담이 크다. 대선을 위해 협상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협상 무대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베 총리로서는 초조할 것이다. 주변국과 불화하는 대외정책을 펴온 결과다.


‘하노이’ 이후 6개월여 만에 ‘트럼프와 김정은의 시간’이 돌아왔다. 결코 놓쳐서는 안될 드문 기회이다. 이번에야말로 북핵 해결과 한반도 평화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협상이 여의치 않다면 한반도 정세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볼턴’도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조호연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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