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연 칼럼]대화는 북핵 면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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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호연 칼럼]대화는 북핵 면죄부가 아니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12. 19.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대북 무조건 대화’ 제안은 사흘 만에 폐기됐다. 백악관이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며 덮은 것이다. 혹시라도 제재·압박 체제에 누수가 생길까봐 황급히 빗장을 거는 모양새다. 온탕 냉탕을 오가는 미국의 태도는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대화는 북한에서도 찬밥 신세다.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대사도 유엔에서 “비핵화 대화를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북 대화 시기상조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지금은 제재하고 압박할 때라는 것이다. 대화무용론도 퍼져 있다. 대화했지만 핵개발을 멈추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러면 압박과 제재하는 동안 핵개발 속도가 빨라진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모든 대화는 소득을 낳는다. 합의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대 의중 파악은 가능하다. 북한이 무슨 의도로 핵을 개발하는지, 핵위협의 진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언제 도발행진을 멈출 건지 가늠할 단서를 제공한다. 모두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모르는 것들이다. ‘닥치고 제재·압박’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효과다.

 

미국과 한국 보수층은 대북 대화 제의를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한 면죄부나 보상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김정은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기 위한 음모로 몰기도 한다. 이는 오해일 뿐이다. 남북은 1983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북한 공작원들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져 17명이 사망한 아웅산 사건 1년여 뒤 대화를 시작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끌어낸 바 있다. 미국 역시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때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었다. 대화가 보상이나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둘 다 성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화가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위협적 행동이 감소하는 것도 검증된 사실이다. 제재와 압박 역시 유용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대화와 협상을 외면한 채 제재하고 압박하면 북한이 손들고 항복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상상하는 것과 달리 대화는 결코 유화 조치가 아니다. 상충하는 국익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무대이기 때문에 온갖 지략과 책략, 독설과 협박이 난무한다. 괜히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보수층이 대화를 깎아내리는 것은 북한과의 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상장에서의 북한은, 협상으로 먹고사는 미국도 손을 들 만큼 집요하고 강력하다. 북한의 벼랑끝전술이나 살라미전술은 세계적으로 호가 났다. 이런 북한을 상대하다 실패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시작조차 않으려는 것 아닌가 싶다.  

 

보수층은 대북 강경책을 신봉한다. 하지만 이 강경책은 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김정은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사회가 제재와 압박책을 펴는 동안 3대 세습 권력자에서 핵대업을 완성한 ‘사회주의 위인’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기세다. 외부에서 제재와 압박을 가할수록 지도자를 중심으로 응집력이 강화되는 북한 체제의 특성 때문이다. 오랜 제재에도 북한이 핵능력을 고도화하고 경제가 성장하는 현실을 가볍게 보면 안된다.

 

물론 국제 정세가 북한에 유리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 규범을 무시한 핵개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내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다. 틸러슨은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급변사태 대비책을 논의했다는 놀라운 정보를 공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중국이 이를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자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과 엄벌 감정이 위험수위라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대화와 압박, 어느 한쪽을 절대화하거나 백안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를 이념의 좌표로 삼는 행태를 배격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도덕적, 이념적 잣대가 아니라 오로지 실용적 차원으로 접근할 사안이다.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대화든 압박이든 가릴 이유가 없다.

 

현재 북핵 대화의 여건은 무르익은 상태다. 북한이 실질적인 핵무력 완성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순간에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협상력 극대화를 노린 대화 신호로 보인다. 미국도 북핵·미사일의 실전배치 이전에 현 수준에서 동결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결론은 대화다. 북한과 미국의 대화 거부는 대화 조건을 둘러싼 기싸움 성격을 띤다.

 

원래 대화는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 신뢰와 비핵화를 대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가 실패한 과거를 답습할 시간이 없다. 대화를 통해 얻어낼 결과를 대화 시작의 조건으로 거는 것은 시간이 필요할 때나 구사하는 전략이다. 자존심과 적대감 때문에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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