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핵 억지력’ 중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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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핵 억지력’ 중독증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8. 17.

미국 공화당의 경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선후보 지명에 반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처럼 불안정한 기질의 소유자에게 핵무기 코드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한 외교 전문가의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미국은 이토록 많은 돈을 쏟아부으면서도 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세 번이나 물었다는 일화는 그런 우려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처음으로 제재 대상에 올린 7월 6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미군 8400명을 철수시키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 _ UPI연합뉴스

 

그런데 트럼프의 우문은 많은 전임 미국 대통령들이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때,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전쟁 때 핵무기를 사용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강경한 매파 딕 체니조차도 1989년 국방장관이 되어 전략사령부의 핵 타격 개념을 브리핑받는 자리에서 그랬다고 한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핵무기의 역설에 있다. 결코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핵무기를 현대식으로 유지해야 하는 역설. 미국 본토 방어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의 많은 동맹국들에 대한 핵우산도 이러한 억지(抑止) 개념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말에 핵무기 선제 불사용원칙을 천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안팎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동맹국이 핵 위협을 받지 않는 한 핵무기를 먼저 쓰지 않겠다는 것으로, 지난 70년간 유지된 핵 선제타격 정책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논리는 북한이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시기에 핵 억지력을 약화시킨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동맹국뿐만 아니라 미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관련 부처 각료들에게서도 나왔다. 이들은 핵 선제타격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재래식 무기에 의한 무력 충돌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핵 선제타격 원칙이 핵 억지력에 얼마나 필수적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핵보유국의 핵무장 명분이 될 수 있고, 무력 충돌 시 우발적 핵 사용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세상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그렇더라도 주요 부처와 동맹국들이 반대하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 뜻을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실패했고, ·러관계 악화로 핵무기감축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핵 선제 불사용 원칙을 천명하려 하는 것은 임기 말 업적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정책 변경을 추진하는 오바마 대통령 등 미국의 핵비확산론자들이 이상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한 뒤로 핵전쟁이 없었던 것은 핵무기 자체에 그 사용을 막는 마법의 힘이 있어서라기보다 우리가 억세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 단추는 대통령이 결정하면 지상배치 미사일은 5, 잠수함 미사일은 15분 안에 발사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면 발사되는 방아쇠(hair trigger)’에 비유된다.

 

누군가 은행을 털면 경찰이 도시 전체를 폭파시킬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경우에 비유해보자. 도둑이 그 협박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긴다면 감히 은행을 털지 않을 것이고, 은행 관리인과 예금주들은 안심할지 모른다. 대다수 주민들은 도시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안전, 평화라고 믿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핵무기의 역설, 핵 억지력의 신화에 너무 중독돼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도 망각한 것 아닌가. 정답에 매몰된 모범생이 되기보다 대안을 찾아보려고 시도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현실적이라고 보는 이유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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