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타임아웃 필요한 원자력협정 협상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특파원칼럼]타임아웃 필요한 원자력협정 협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2. 6.

유신모 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16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만난 자리에서 “핵폐기물 처리 문제가 대선 공약으로 얘기할 정도로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인 만큼 국제사회가 신뢰할 좋은 대안을 마련하고 논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언론들은 박 당선인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권리를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했다. 


이 보도가 사실인지를 묻는 미국 핵에너지 관계자들의 e메일을 몇 통 받았다. 한 인사는 한국이 핵무장을 염두에 두고 재처리 권리를 확보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의 핵무장 시도를 상기시키며 반농담으로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극비 추진했던 핵물질의 운반 및 저장탱크 도면 (출처 : 경향DB)


미국 측 인사들의 우려는 약간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이 선거 이후 처음으로 미국 당국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것도 원자력협정과 무관한 캠벨 차관보에게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요즘 물밑에서 진행되는 한·미 간 논의의 기류도 좋지 않다. 특히 한국 측은 최근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 핵연료 건식처리) 문제를 다시 꺼내들고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2010년 한·미가 10년간 공동연구해 그 결과를 협정에 반영하기로 하고 일단락된 사안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 측은 개정 협정문에 파이로프로세싱 허용을 분명하게 적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주 정부 관계자와 원자력연구원 소속 전문가 몇 명이 워싱턴을 방문해 미 의회 관계자들을 상대로 파이로프로세싱에 대한 설명회를 연 적이 있다. 미국 여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참석자는 달랑 1명뿐이었다. 미국이 냉소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원자력계는 파이로프로세싱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어렵기 때문에 핵확산 우려가 없고, 핵연료 재활용은 물론 핵폐기물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우선 파이로프로세싱은 세계 각국이 수십년간 연구하고도 아직 개발하지 못한 고속로를 필요로 한다. 개발과 상용화에 성공해 수십기의 고속로를 가동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핵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 성공 여부도 불확실하고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지도 알 수 없다. 또 파이로프로세싱은 한국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핵폐기물 중간저장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또한 미국은 파이로프로세싱은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재처리라고 이미 오래전에 결론내렸다.


현행 협정은 내년 3월19일 종료된다. 개정 협정은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올해 상반기 안에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시한을 맞출 수 없다. 한·미가 지금 같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좁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더구나 미국은 지금 협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다. 수석대표인 로버트 아인혼 국무부 비확산 담당관은 조만간 사임한다. 외국과의 원자력협정을 위한 미 행정부의 공식 방침도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한·미가 만나 협상을 진행해봐야 외교적 충돌만 키울 뿐이다. 더구나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하면 격앙된 국내 여론 때문에 이성적인 협상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시간에 쫓기면서 협상을 하느니 현행 협정을 1~2년 연장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낫다. 그 기간 동안 파이로프로세싱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원자력 마피아의 밥그릇만 키우는 것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파이로프로세싱을 미국에 요구하기에 앞서 국민적 동의를 얻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수조원, 아니 그 이상의 세금과 한국 에너지·안보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이를 위해 협정 개정을 1~2년 미루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