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②-1 포인트호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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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경향신문 지나간 기획

8부 ②-1 포인트호프의 위기

by 경향글로벌칼럼 2008. 6. 30.

포인트호프·앵커리지(알래스카) | 글·사진 최명애기자

ㆍ석유 개발로 ‘고래 사냥터’ 생태 교란

“얼음 아래로 그림자처럼 녀석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작살을 던졌지. 고래를 잡아오는 날이면 동네 사람 모두가 축제를 벌였는데…. 올해는 겨우 세 마리뿐이야. 예전처럼 고래가 오지 않는다고.”

 


포인트호프 마을 묘지의 모습. 고래 뼈와 십자가가 공존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알래스카 북부 포인트호프 마을의 고래 캡틴 루크 크누크(80)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3살 때 부친을 따라 처음 고래 사냥을 나간 그는 평생을 바다에서 보냈다. 1970년대만 해도 봄이면 마을 전체에서 고래 10~14마리를 잡았는데, 올해는 세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그나마 한 마리는 얼음이 깨져 놓쳐 버렸다. 그는 “얼음이 얼지 않고 자꾸만 얇아진다. 고래의 이동 경로도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포인트호프는 고래 사냥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알래스카 에스키모 10개 마을 가운데 한 곳이다. 해빙(海氷·sea ice)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4월부터 6월까지 고래를 잡아 한 해를 난다. 그러나 고래 사냥철인 5월30일 마을은 조용했다. 주민들은 고래잡이를 나가는 대신 집안에 앉아 ‘빙고 게임’을 하며 백야를 보내고 있었다. 고래 선원 헐버트 키니바크는 “고래잡이 시즌이 사실상 끝났다”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두 달이었는데, 요즘은 5월 초 2주면 끝나요. 바다가 미쳐가고 있어요.”


# 고래잡이 시즌 2개월서 2주로

마을엔 아직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포인트호프는 추크치 해를 사이에 두고 시베리아와 마주보고 있다. 1만년 전 몽골로이드가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내디딘 곳이다.

60~70년 전만 해도 땅을 파서 지은 뗏집(sod house)에서 살았다. 고래 뼈로 입구를 지지하고 카리부(순록) 가죽으로 문을 대신했다. 뗏집은 북극의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한 에스키모 고유의 가옥 형태다. 흔히 알려진 이글루는 사냥 때 임시로 짓는 일종의 ‘텐트’다.

포인트호프 외곽엔 아직 뗏집 10여채가 남아 있다. 마을 묘지에는 십자가와 함께 고래 늑골이 잔뜩 꽂혀 있었다. 나무가 자라지 않아 예전에는 고래 뼈로 무덤을 표시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고래 뼈를 쌓아두는 ‘칼르기’가 있다. 마을의 상징이자 성스러운 장소다. 현관마다 고래 수염이 걸려 있고, 마당에서는 고래 사냥용 카약 ‘우미아크’가 말라가고 있었다. 4000년 이상 고래에 기대 살아온 이들에게 고래는 단순한 먹거리 이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고래를 잡는 것이 아니라 고래가 스스로를 우리에게 준다”고 했다. 마을에는 고래 비린내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바닷가에서는 지난달 24일 잡은 북극고래를 해체하고 있었다. 지방이 약간 붙은 고래 껍질 ‘마크탁’은 에스키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살과 지방은 먹고, 뼈는 표지석으로 활용하고, 수염으로는 바구니를 만든다. 북극고래의 길이는 10~18m, 몸무게는 1t으로 ‘집채’보다 크다. 고래 한 마리면 900명이 넘는 마을 전체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옆에서는 다이언 오크토힉(58·여)이 반달 모양의 전통 칼 ‘울루’로 턱수염물범의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다. 오크토힉은 “고기는 먹고, 지방은 끓여 소스를 만들고, 가죽은 말려 8마리씩 기워 ‘우미아크’에 씌운다”며 “물범, 고래, 바다사자 같은 해양 포유류가 우리의 주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의 기후 변화로 해양 포유류 사냥은 예전만 못하다. 물범의 휴식처이자 사냥꾼의 사냥터인 해빙의 결빙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10월이면 얼기 시작하던 바다가 이번 겨울의 경우 1월에야 겨우 얼기 시작했다. 해빙뿐만이 아니다. 포인트호프 부족회의 수석 매니저 릴리 투츨루유크는 “북극이 기후변화에 있어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고들 말하는데, 우리야말로 바로 그 카나리아”라며 “지구 온난화로 최근 몇년 동안 마을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마을과 외부를 잇는 공항이 가장 큰 문제다. 해빙의 결빙이 늦어지면서 활주로 앞 땅이 폭풍에 깎여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1.5~2.4m씩 깎여 이제는 활주로와 바다 사이가 겨우 24m 남았다. 실제 포인트호프로 착륙하는 순간 비행기는 바다를 향해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영구 동토층이 녹아 내리면서 주민들이 고래 고기를 보관해 온 땅 속 저장고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고래 고기 냉장고’를 별도로 구입해야 할 형편이다. 몇 대째 마을에 살아왔다는 팝시 키니바크(54)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던 이곳에 버드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온난화로 결빙 석달이나 늦어져

포인트호프 주민들은 5월 초 미 내무부와 광물관리국 등을 상대로 “셸 등 정유업체의 석유 시추 지진 테스트를 중단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2007년 7월 포인트호프 앞 추크치 해와 보퍼트 해 7200만에이커에 대해 석유 개발을 허용했다. 광물관리국은 이 일대에 240억배럴의 석유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셸, 코노코필립스 등 5개 사가 올 여름 석유 시추 테스트를 본격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추크치해의 석유 시추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민들은 석유 개발로 삶의 방식이 바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환경단체 태평양환경(Pacific Environment)에 따르면 추크치 해는 전 세계 북극고래의 20%, 흰돌고래의 40%가 이동 경로로 이용하는 지역이며, 회색고래·혹등고래와 바다사자의 사냥터다.

포인트호프 시 정부 환경프로그램 담당자 에마 키니바크는 “석유 지진 테스트가 시작되면 음파로 교신하는 고래와 물범의 생태가 교란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머리 없는 물범 시체들이 잇달아 바닷가로 떠밀려왔다”며 “시범 지진 테스트로 인한 충격 때문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기름이 유출될 경우 바다 위를 덮고 있는 해빙으로 인해 방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도 문제다. 시추 작업 편의를 위해 일부 해빙을 인공적으로 제거할 가능성도 있다.


# 전통적 사냥 어려워져 생존 위협

릴리 투츨루유크는 “지구 온난화의 피해를 겪고 있는 우리들이 이제는 삶의 방식까지 바꾸도록 강요받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앞서 포인트호프 부족 회의는 2006년 미 의회와 대통령에 대해 “기후 변화로 인한 날씨·눈·얼음의 변화가 전통적인 사냥을 어렵게 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조치를 즉각 시행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31일 주민 헐버트 키니바크는 저녁식사로 ‘마카로니 앤드 치즈’와 함께 ‘흰돌고래 수프’ ‘마크탁’을 준비했다. 닌텐도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를 갖고 놀던 아이들이 냉장고에서 콜라를 하나씩 꺼내 들고 식탁에 앉았다. 에이미 아퉁아나(9)가 좋아하는 음식은 피자보다는 마크탁이다. 에이미는 10년 뒤면 물범 가죽을 벗겨 우미아크를 만들 것이다. 에마 키니바크가 말했다. “고래잡이와 사냥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이에요. 우리 아이들에겐 마크탁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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