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칼럼]아무것도 결정 못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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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칼럼]아무것도 결정 못하는 정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5. 23.

강상중 | 도쿄대 대학원 교수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서 바라볼 때 일본 정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정권들이 단명에 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권의 황망스러운 교체극에 일본 국민도 질려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일본 단명 정권의 괴이함이 두드러져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 중국과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국내에서는 압도적인 인기를 토대로 상당히 장기간 지속된 고이즈미(小泉) 정권 이후 아베(安部), 후쿠다(福田), 아소(麻生), 그리고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뒤 하토야마(鳩山)와 간(菅) 등 불과 수년 만에 다섯 정권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지금의 노다(野田) 정권도 지지율 혼미와 당내 혼란 때문에 언제 국회 해산과 총선거라는 국면에 들어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정도로 일본 정치가 불안하다면 역사 현안, 외교, 안보, 무역과 통상 문제 해결 등과 관련해 과연 일본 정부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한국으로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적어도 중장기적으로 국가 간 대화와 협력, 국가전략에 기반한 문제 해결 노력 등을 기대할 수 없게 됐음에 틀림없다. 결국 정치 주도의 외교와 교섭, 새로운 차원의 한·일관계 구축 등에 결단력 있는 대응이 불가능하다면 정치의 공백과 부작위(不作爲)를 관료정치가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관료정치가 과거 조약과 협정의 일언일구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면 한일협약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체결 당시에는 논의되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와 역사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정치적 결단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당직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l 출처:경향 DB

게다가 일본에서는 ‘세제와 사회보장 일체개혁’과 소비세 증세, 원자력발전소의 재가동, ‘1표의 격차’를 둘러싼 시정조치(선거구 조정 문제), 오키나와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설 문제 등 여당과 야당 사이뿐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도 균열이 발생해 거의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문제 해결이 계속 보류되고 있다.

지지율 하락에 고심하는 노다 정권은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의 ‘네지레’(상·하원에서 각기 다른 당이 다수당인 상태)도 있어 최대 야당인 자민당에 접근하면서 동시에 여당인 민주당 내부 융화를 꾀하는 양동작전을 펴고 있지만, 타개의 길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이런 정권의 딜레마를 싸늘한 시선으로 보는 국민들 사이에선 정당정치 자체에 대한 원망과 한탄마저 자라고 있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정치’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정치’가 지속되면서 의회는 정당 간 흥정과 잡담장으로 변했고, 국민은 그 저급한 소극을 봐야 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일찍이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지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도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다당병립의 소수여당 정권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은 나치스의 독재정치로 대체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덤을 판’ 이들 중에서 헌법학, 정치학에 중대한 역할을 한 학자 칼 슈미트는 아주 적절하게도 의회민주주의를 ‘잡담 기관’이라고 야유했다. 민주적인 결단은 뒤로 미루고 당리당략에 빠진 우유부단한 의회정치를 비꼰 말이다.

일본의 경우, 1929년 월가 대공황에서 파급된 쇼와(昭和)공황의 위기 속에서 민정당과 정우회라는 양대 정당제가 기능부전에 빠지면서 군부가 대두했고, 마침내 정당정치에 기초한 의회정치는 ‘쇼와유신’의 파쇼적인 열광 속에 매몰돼 갔다. 확실히 현재의 일본 정치를 1930년대와 비교하는 것은 비약임에 틀림없다. 역사는 꼭 닮은꼴로 되풀이되는 것도 아니며 안이한 역사 유추는 금물이다. 다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정치,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정치라는 점에서 현재와 1930년대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전후 민주주의가 정착한 일본에서 옛날처럼 ‘혁신막료’ 같은 청년장교들이 등장하는 무대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성정당과 다른 ‘제3세력’으로서 오사카시(市)와 오사카부(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정당이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타파를 내걸고 국민적인 큰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기이하게도 이번에도 ‘유신’이 슬로건인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정치를 바꿔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정치, 국민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강력한 ‘결단주의’의 거버넌스이다. 이런 움직임이 과연 기성 정당정치에 얼마만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또 ‘제3세력’과 기성세력 간의 융합이 얼마나 진전될 것인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본 정치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돼온 이른바 ‘전후 민주주의’와 다른 ‘포스트 전후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움직임이 한·일관계와 역사 문제, ‘일본군 위안부’와 영토 문제 등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지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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