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양저우가 최치원을 기억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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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경향의 눈]양저우가 최치원을 기억하는 까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1. 3.

경남 함양 사람이 외지에 살면서 고향이나 옛 친구보다 더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함양읍 서쪽 위천 변에 있는 상림공원이다. 신라 말 천령군이던 이곳 태수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둑을 쌓아 조성한 숲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다. 지난 초가을 이곳을 거닐면서 ‘신라 최고 천재’라든가 ‘당송 100대 시인’ ‘황소를 떨게 한 명문장가’로만 알던 최치원의 전혀 다른 면모를 생각하게 되었다.

천년 하고도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최치원을 현세인이 기억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12세에 당나라에 건너가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에 단번에,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한 것을 그 하나로 꼽을 만하다. 학업 성취에 대한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서일까. 당나라 시대의 개방적인 분위기와 최치원의 놀라운 성공담은 지역 간 대학 진입 장벽이 높고 경쟁이 심한 요즘의 중국 젊은이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 동북아역사재단이 진행하는 ‘동아시아 역사 현안 현장 언론인 답사’ 일정 중에 양저우(揚州)를 방문했을 때 현지 안내자가 한 말이다.

최치원은 생전에 고국인 신라보다 중국에서 더 실력을 인정받았고, 사후에도 오히려 중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고 할 만하다. 양저우시는 2007년 중국 외교부의 비준을 받아 당성(唐城) 유적지 안에 최치원기념관을 개관했다. 입구 안내판에도 ‘첫번째로 세워진 외국인 기념관(第一外國人紀念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당성 유적지는 수나라 양제의 행궁과 당나라 회남절도사 관아가 있던 곳으로, 당나라 고성이 드물게 잘 보존된 곳으로 꼽힌다. 최치원이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약 5년간 근무한 바로 그 자리다. 이런 중요한 유적지를 외국인의 기념관으로 조성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이라고 한다.

양저우는 당나라 시대 장안·낙양에 이은 제3의 도시이자 최대 국제 무역항이었다. 최치원은 ‘교통이 편리하고 경제가 번영하여 문풍이 창성한’ 이곳에서 능력을 크게 발휘했다. 토황소격문 등 많은 공문서와 한시로 문명을 떨쳤고, 지역의 일류명사 및 문인과 깊이 교유했다. 당 황제는 최치원의 문재와 공로를 기려 정5품 이상에게 주는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양저우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계는 최치원이 귀국해서 양저우에서 쓴 공문과 한시문을 정리해 펴낸 <계원필경>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최치원기념관도 “문자가 정미하고 내용이 풍부하여 한문화 문재를 엿볼 수 있으며 높은 문학적 가치와 중요한 사료 가치가 있다. 이는 현존하는 한국의 첫 개인 저작이다”라고 소개했다.

최치원기념관을 돌아보며 특별히 눈길이 머문 것은 쌍녀분(雙女墳)과 ‘선녀의 붉은 주머니(仙女紅袋)’ 전설을 언급한 부분이다. 선녀홍대 전설은 최치원이 급제 후 처음 율수현위란 벼슬을 제수받고 근무하던 중 부모가 맺어준 강제결혼을 피해 자살한 두 장씨 자매의 원혼을 달래주었다는 내용이다. 쌍녀분은 지금의 난징시 가오춘현에 지금까지 장씨 자매의 것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다. 이곳으로 가는 다리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딴 ‘치원교(致遠橋)’라고 한다.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의 초상화 (출처 : 경향DB)


20세 청년관리와 두 처녀귀신의 이야기는 함양 상림공원이 말하는 최치원의 면모와 일맥상통한다. ‘이상적인 위민관’으로서의 모습이다. 상림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던 한 지방관의 업적이 천년이 지나서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경우다. 당대에 홍수를 막고 현세에 도심 속 최고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가치를 오히려 더해가고 있다. 함양군은 이곳에 ‘고운 최치원 선생 역사공원’을 조성한다고 한다. 난징 쌍녀분 이야기 또한 백성과 깊이 소통하며 민원을 풀어주는 지방관의 모습이 전설로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저우시가 최치원을 높이 평가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한·중 우호교류다. 한·중 문화교류사의 대표적 인물인 최치원을 매개로 두 나라 우호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게 최치원기념관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결론이다. 이는 물론 최치원의 성공 스토리와 여러 위대한 업적들을 바탕으로 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천년이 지나도록 그의 이름이 퇴색하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는 데에는 상림공원과 쌍녀분이 말하는 애민정신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현대판 상림을 표방했던 4대강과 300명이 넘는 세월호의 원혼은 천년 후 어떻게 기억될까.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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