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역사의 종언’과 한국 외교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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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역사의 종언’과 한국 외교의 목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1. 6.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라는 책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진보는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후쿠야마의 주장이 맞는다면 지금 세계는 이념경쟁의 시대가 저물고, 모든 정치체제의 대안 모색 과정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마지막으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있어야 한다.

관련하여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체제전환을 시작해 이미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러시아와 같이 급속도로 체제전환을 한 국가가 있는 반면 중국과 같이 천천히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다. 그런데 후쿠야마의 예언과는 달리 이들 국가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정치체제가 모두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체제이고 러시아도 권위주의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착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이에 대한 후쿠야마의 생각은 어떨까?

요즘 후쿠야마 자신도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그렇게 자유로워 보이지 않고, 미국에서는 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치 양극화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념경쟁의 역사가 끝났다는 본인의 주장은 고수하고 있다. 자신의 견해가 바뀐 것이 있다면 자유민주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속도에 관한 것뿐이라고 강변한다. 이에 대한 나의 판단은 후쿠야마가 말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세계화되는데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후쿠야마가 주장한 대로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개 방향이 크게 꺾이거나 뒤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아직 찾을 수 없다. 즉 앞으로의 세계는 정치적으로 굴곡은 있겠지만 개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큰 흐름에서 역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방향을 읽은,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의 정치세력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분명히 선을 그은 보수, 진보의 이념경쟁과 정책경쟁을 버리고 제3의 길이나, 진보와 보수의 융합이 이루어진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의 외교는 아직 냉전기의 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과거 냉전기의 외교안보 패러다임은 매우 단순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팽창을 막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의 팽창 속에 들어가면 이른바 사회를 지탱해온 “정치경제체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것의 군사적, 이념적, 문화적 충돌이 냉전이었고, 한국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진영의 편에 서서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탔다. 그리고 이때 우리의 외교안보정책은 한·미동맹 강화 및 서방진영과의 협력증진이 핵심이었다.

경향 글로벌 청소년 외교 포럼이 열린 서울 올림픽 파크텔에서 비쉬누 프라카쉬 주한 인도대사가 학생들에게 외교 특강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의 팽창이 끝난 지금 우리의 외교안보 패러다임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외관상으로는 새롭다. 한·미동맹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중견국, 신뢰외교 등 새로운 발상이 보인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팽창을 막는다는 외교의 목표를 대체해 이러한 새로운 외교를 하면 우리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득이 될지 명확한 설명을 아직 보지 못했다. 단지 평화와 번영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만이 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발표된 미국 시카고 카운슬(Chicago Conuncil)의 2014년 한·미 인식조사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 국민들이 생각하는 외교의 목표가 아주 구체적으로 우선순위 별로 나열돼 있는데 1등은 다름 아닌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 보호’이고 안정적 에너지 확보와 관련된 것이 2등과 4등으로 나온다. 미국 기업의 해외 이익을 보호하는 목표도 8위에 올라와 있다. 대부분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목표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이는 바로 미국이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외교안보정책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종언을 바라보는 우리도 이제 평화와 번영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를 넘어서서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외교 목표와 수단을 제시해야 한다.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싱크탱크 미래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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