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파리 협정에 담긴 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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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경향의 눈] 파리 협정에 담긴 야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2. 14.

기후변화 문제와 관련해 자주 듣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야심(ambition)’이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나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기여를 기대보다 높게 설정하거나 그렇게 했음을 강조할 때 즐겨 쓰는 말이다.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12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도 이 표현이 무성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까지도 정상회의와 고위급 세션 연설에서 한국이 제출한 자발적 감축 목표에 ‘야심 찬’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윤성규 환경부 장관도 환경건전성그룹 대표로 기조발언을 하면서 새로운 기후체제가 ‘야심 차고’ 강력한 내용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장관의 기대가 통했던 것일까. 한국의 감축목표가 야심 찬 것인지는 논란이 많지만 당사국총회의 최종 결과물인 ‘파리 협정’이 야심 찬 것이라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 제한 목표를 산업혁명 이전 대비 섭씨 1.5도로 설정한 것부터가 그렇다. 협정은 2도보다 훨씬 낮게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1.5도까지 제한하도록 노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2도 이내 제한 목표는 2009년 코펜하겐 합의문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도 제5차 평가보고서에서 2도 이내 제한 시나리오는 제시했지만 1.5도 이내 제한 시나리오는 아예 다루지조차 않았을 정도다.

군소도서국가나 일부 환경단체 중심으로 제기됐던 1.5도 상승 제한 목표가 파리 회의에서 쟁점으로 부상한 배경에는 ‘야심 찬 감축 연대(High Ambition Coalition)’라는 협상그룹이 있다. 군소도서국가를 비롯한 기후 취약국과 유럽연합(EU)이 주도한 이 그룹에 미국까지 가세하면서 강력한 협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윤성규 환경장관_연합뉴스


1.5도 상승 제한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목표다. 지금까지 187개국이 제출한 감축목표만으로도 2.7도 상승한다는 게 유엔환경계획을 비롯한 기후변화 전문기관의 분석이다. 이미 지구 평균온도가 0.8도 상승했고 온실가스 배출과 그에 따른 온난 상승 사이의 시간차로 인해 앞으로 0.6도 추가 상승이 불가피하다는 과학계의 견해도 있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2도 시나리오보다는 30~40년 앞당겨 2050년쯤에는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가 균형을 이루는 ‘탄소 중립’에 도달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그야말로 야심 찬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파리 협약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또 다른 형태의 야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세기 후반에 이산화탄소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담은 것은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과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을 알리는 분명한 신호다.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 협상의 큰 쟁점이었던 손실과 피해 메커니즘과 연간 1000억달러 이상을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는 새로운 재정 목표를 설정하도록 명시한 것도 부족한 점은 있지만 의미 있는 진전이다.

파리 회의는 6년 전 답답함과 실망감만 안겨주었던 코펜하겐 회의와는 달랐다. 테러 여파로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자유로운 분위기였으며 협상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느낌을 주었다. “이번처럼 평화로운 총회는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자발적으로 정한 감축목표에 국제법적 구속력이 부과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벌칙을 가할 수 없는 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치·경제적 상황이 그만큼 달라진 요인이 더 클 것이다. 시리아 난민 사태와 파리 테러에서 보듯이 기후변화는 이제 정치 현실, 안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기후변화 시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도 에너지 신산업을 통해 100조원 신시장과 50만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전환을 추동하는 세력으로 시민사회를 빼놓을 수 없다. 1.5도 목표라든가 손실과 피해 메커니즘, 재정 지원 문제 등 파리 협약에 담긴 많은 내용이 시민사회가 꾸준히 제기해온 사안이기도 하다. 인권과 건강권, 원주민과 난민의 권리, 성 평등, 세대 간 형평성, 정의로운 전환 등 시민사회가 추구해온 가치도 협약 전문에 선언적으로나마 언급됐다.

한국 시민사회는 이번 파리 회의에 사상 최대 규모인 80여명이 참여했다. 58개 단체의 네트워크인 기후행동2015가 파리 곳곳에서 활동을 벌였다. 기독교·불교·천주교 등 종교계가 대거 참여한 것도 전에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이들이 함께 회의장 등을 묵언행진하는 퍼포먼스가 특별히 주변의 눈길을 끄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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