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러시아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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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러시아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8. 3.

국제사회에서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정상 국가로 다시 태어나려는 장기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전환점일 수도 있다. 298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난달 17일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 피격 사건은 국제 여론의 획기적 반전을 가져왔다. 피격의 주범이 러시아가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반군 세력일 가능성이 높으며, 군사자문이나 무기제공 등을 통해 러시아가 깊이 개입되었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미국과 유럽의 여론과 정책이 돌변했다.

지난 봄까지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장기 국익을 냉철하게 지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국제법을 무시한 크림 반도 합병이나, 우크라이나 내전을 야기하는 반군 지원은 모두 비난받아 마땅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영토를 확장하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완전히 기우는 것을 막겠다는 냉혹한 계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국제 여론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에 장기 국익 확보의 마키아벨리적 전략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서방의 언론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요청했지만, 푸틴의 계산대로 미국과 유럽의 정부는 다양한 이익을 염두에 두고 망설였다. 그나마 러시아와의 상호의존도가 낮은 미국은 제재 조치를 취하며 앞서갔지만, 유럽 국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말로만 러시아를 비난하였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군함을 수출하는 계약을 취소할 수 없다고 버텼다. 러시아와 긴밀한 경제 협력의 전통을 가진 독일 역시 제재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러시아 부호들이 선호하는 투자 및 거주지인 영국 또한 런던의 금융 이익을 지키려 하였다.

유럽에서 네덜란드도 러시아에 대해 대표적인 비둘기파였지만, 자국민 180여명이 목숨을 잃은 항공기 피격 사건 이후 매파로 돌아섰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의 주요 세력도 더 이상 제재 강화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지난달 29일 미국과 유럽은 금융과 기술이전의 두 부문에서 강한 러시아 제재 조치를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를 장악한 친러시아 반군 관계자(오른쪽)가 피격된 여객기 블랙박스를 말레이시아 조사단에 넘겨주고 있다 _ AP연합


금융에서는 돈줄을 조임으로써 러시아의 경제를 압박한다는 전술이다. 러시아의 국영은행들은 서구의 자본을 도입하고 동원하기가 어려워졌다. 당장 3년 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150억달러의 외채가 문제다. 작년 상반기 250억달러에 달하던 외국은행의 대 러시아 대출은 올 상반기 79억달러로 축소되었다. 또 러시아는 기술이전이 제한됨으로써 무기나 석유의 개발에 제약을 안게 되었다. 푸틴의 국방 근대화 계획은 벽에 부딪히고 북극 지역에서의 석유 개발도 지속되기 어려워졌다.

물론 푸틴은 확고한 국내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다. 서방에 대항하면서 크림 반도를 되찾아 온 지도자로서 80% 이상의 여론 지지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위대한 러시아를 되찾은 대가는 국제적 고립과 장기적 고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다가오면 푸틴은 가스 공급을 볼모로 유럽을 협박하는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협박은 유럽의 더욱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위험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국제무대에서 야만스러운 독재체제, 잔인한 협박국가, 무자비한 내전 지원국의 이미지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비극적인 사실은 러시아의 확고한 여론이 정권의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의 82%는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킨 것이 우크라이나 군대의 소행이라고 믿는다. 푸틴이 탄 항공기를 타격하여 암살하려다 실수한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언론 조작과 국수주의 여론몰이가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푸틴의 장기독재가 지속될수록 러시아의 미래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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