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아베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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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아침을 열며]아베의 착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8. 10.
“부잣집 도련님이 뭘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2006년 일본의 한 대학에서 연수를 할 때였다. 그해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총리에 오르자 알고 지내던 한 일본인 대학원생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아베가 역대 최연소(취임 당시 52세)에 전후 세대 첫 총리가 됐다는 점과 함께 ‘젊은 리더’에게 국가의 재생을 맡기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란 평가도 들렸지만 그의 얘기는 달랐다.

아베가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전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밑에서 관방장관을 맡으며 보여줬던 강단있는 모습이 적잖이 작용했던 것 같다. 아베는 2002년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 때 수행해 “안이하게 타협해서는 안된다”며 강경론을 폈고, 5명의 납치피해자 귀국이란 성과를 이끌어냈다. 샌님 같은 외모와 달리 ‘할 말은 하는’ 강한 이미지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정권 공약으로 내건 아베는 ‘전후 레짐의 탈피’ ‘주장하는 외교’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겠다고 했다. 당시 총리 경쟁자였던 아소 다로(麻生太郞)나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의 공약집이 각각 25쪽에 달했지만 아베는 단 4쪽에 불과했다. 그만큼 국가경영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와 동시에 젊은 리더로서 패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해석됐다.

딱 1년이 지나자 그가 돌연 총리직을 내던졌다.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 참패에 대한 문책성 사임이었지만 사실 재임 기간 중 악재가 잇따랐다. 각료들의 비리 의혹 등이 터졌고 일본인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인 원폭 투하를 두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방위상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켰다. 선거 패배 직후 미 하원에서는 ‘위안부 비난결의안’이 통과됐다. 17살 때부터 그를 괴롭혀온 궤양성대장염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베가 다시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은 5년 뒤였다. 2006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일방적 표차로 승리해 총리에 오른 것과 달리 2012년 9월 선거는 접전으로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에게 뒤졌지만 결선에서 역전드라마를 연출했다. 1956년 자민당 총재 선거 사상 결선 투표에서 뒤집힌 것은 처음이었고, 한 차례 사임했던 총리가 재선에 성공한 것도 최초였다. 그런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이후 아베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법 해석을 바꿔 평소 지론인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는가 하면, ‘무기수출 금지 3원칙’도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이라고 말을 바꿔 교묘하게 무기 생산과 수출의 길을 열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해외를 순방하며 집단적 자위권의 용인이 오히려 전쟁을 억제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주변에서는 “아니다”라고 하는데 자신은 “옳다”고 하며 현안들을 밀어붙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결정을 한 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_ 뉴시스



일본의 작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그의 저서 <쇼와시(昭和史)>에서 “일본인은 위기상황에서 추상적인 관념론을 매우 좋아해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목표를 먼저 설정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붙여 ‘공중누각’을 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어떤 사안이 자신의 희망대로 움직일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역시 그랬다. <쇼와시>에 따르면 1941년 11월 일본 대본영 정부연락회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전망에 대해 논의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독일이 유럽에서 승전하면 미국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상실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 해군 주력부대를 일본 근해로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계획도 세웠다. 여기에 언론의 선동, 국민적 열광이 더해지면서 일본은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 해군은 미국에 대한 선제 공격에 반대했지만 내각을 사실상 장악했던 육군의 기세에 밀려 전쟁 찬성으로 돌아섰다. ‘개전(開戰)’ 분위기가 정해지자 다른 논리나 이성적 판단은 끼어들 틈이 없게 됐다. 하나의 잘못된 목표를 정해놓고 국가운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면서 일본은 파멸로 치닫게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아베의 행보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될 것이란 기대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 전체가 열광해 그의 뜻을 추종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곳곳에서 ‘폭주’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아베는 ‘역사에서 교훈을 배운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로부터 ‘반성의 재료’를 얻어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의미다.

조홍민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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