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오바마의 ‘비밀해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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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오바마의 ‘비밀해제 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4. 3.

지난달 역사적인 쿠바 방문과 브뤼셀의 테러 행위에 묻힌 감이 있지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방문은 꽤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오바마는 20세기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독재시기로 평가받는 ‘추악한 전쟁’의 개시일, 즉 1976년 3월24일 군부쿠데타의 발발 40주년에 즈음해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다.

당시 군부 세력은 7년 동안 좌파 정치인, 노조활동가, 학생, 인권운동가 등 약 3만명의 정치적 반대파를 납치·고문·살해했다고 알려졌고 이 ‘추악한 전쟁’은 야만적인 인권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3월24일은 군부독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로 준수되고 있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아르헨티나의 군부쿠데타가 미국의 승인이나 방조 아래 감행됐으며 미국 정부가 군부통치자들을 후원했다고 믿고 있다.

이 방문을 통해 오바마는 쿠바와의 긴장 완화가 실증하듯 라틴아메리카에서 굳어져버린 미국의 강압과 일방주의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지속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쿠바 방문에 비해 확실히 덜 극적이지만, 오바마가 3월24일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모험이었다. 미국의 정보기관과 아르헨티나 군부의 공모뿐 아니라 미국 정부가 그 뒤 발생한 대대적인 인권유린 사태를 묵인·방조했다는 의혹 때문에 수십년간 껄끄러웠던 양국 관계를 전환하려는 정면 승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븨뤼셀 테러 희생자 애도 묵념을 하고 있다_AP연합뉴스

오바마 대통령은 라플라타 강 연안의 추모공원을 찾아 강에 수천명의 이름이 새겨진 ‘국가폭력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우리는 과거를 잊을 수 없으며 과거와 대면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곳은 희생자의 시신뿐 아니라 일부 부상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로 내던져진 ‘추악한 비행’의 현장이었다. 오바마는 자국 정부가 인권침해 행위를 규탄하는 데 너무 더뎠다고 밝혔지만, “어두운 시대에 시행된 미국의 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고, 의도와 달리 역효과를 내거나 미국이 옹호해야 하는 가치에 어긋나는 때도 있었다”는 선에 그치면서 미국 정부의 군부 세력 지원을 사과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다만 오바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세부 사항과 미국 정부가 아르헨티나 군부의 ‘추악한 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등을 밝힐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그동안 비밀로 묶어두었던 국방부와 정보기관, 사법당국 등의 문서 자료들을 해제하고 공개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정보열람의 자유’ 법에 부응한 2002년 미국 국무부 문서의 부분적 비밀해제의 범위를 뛰어넘는 조치이다. 미국 정부의 비밀 유지에 반대하면서 지속적으로 문서 공개를 촉구해온 비정부기구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선임연구원 피터 콘블러에 따르면, 오바마의 ‘비밀해제 외교’는 박수를 받아야 할 정책이다. 콘블러는 이 결정이 군부쿠데타와 인권 탄압에 대한 미국의 후원을 속죄하고 보상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 실종된 자녀와 형제자매를 찾고자 수십 년 동안 뼈저린 아픔을 짊어져야 했던 희생자 가족들에게 실제 증거와 답변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바마의 방문과 관련해 아르헨티나의 주요 인권단체들은 당시 미국의 역할을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유가족과 친척 단체들은 오바마 방문의 시점을 ‘도발’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아르헨티나 방문 직전 쿠바에서 정치범 문제를 비롯해 쿠바의 인권 상황 개선을 거듭 역설한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좁은 의미의 국가안보론과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확대에 골몰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금과옥조를 희생시킨 냉전 시대의 잘못된 선택을 반성하고 책임 회피 상태에서 벗어나는 전환을 이룰지, 아니면 오랫동안 뒷마당으로 여겨온 라틴아메리카의 문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데 관심을 쏟는 차원의 외교적 행보에 그칠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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