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카다피, 혁명가와 독재자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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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카다피, 혁명가와 독재자 사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3. 14.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아랍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이 금괴를 갖고 해외로 도피하고, 30년 철권통치의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도 물러났다. 42년째 집권하는 리비아의 카다피는 지금 자신의 국민들을 상대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카다피는 당초 자살하거나 곧 붕괴되리라는 서방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도 잘 버티고 있다. 그것은 특이한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카다피가 리비아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너무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청년시절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나는 카다피를 세 번 만났다. 대학원 재학시절 카다피가 창안한 제3의 보편이론에 관심을 두고 그의 저서인 <그린북>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을 쓴 것이 인연이 됐다. 초청을 받을 때마다 장장 3시간이 넘는 연설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천부적인 웅변가이자 대중 선동가였다. 1969년 9월1일, 27세의 청년 카다피가 혁명을 성공시키고 반외세 반굴종의 기치를 내걸며 국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자주국가를 표방했을 때, 리비아 국민들은 물론 많은 제3세계 청년들에게 카다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였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대신한 국민집회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도덕적 경제와 이슬람 사회주의, 여성 해방과 남녀역할 분담론, 완고한 이슬람 율법체계에 대한 과감한 개혁 등을 통해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경향DB)


또 하나, 카다피가 행한 아랍세계를 위한 큰 공헌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자극해 원유 제값 받기 운동에 불을 붙였다는 점이다. 그는 메이저 석유회사 대신 주로 리비아 석유에만 의존하던 개별 석유회사들을 상대로 원유가 인상을 성사시켰다. 1970년대까지 국제유가는 배럴당(약 169ℓ) 겨우 2달러 수준이었다. 그 결과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와 서방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배럴당 15달러 이상으로 치솟으며 누적된 가격 착취구조를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

장기집권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불변의 진리처럼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 통치방식도 1980년대 말 구소련의 사회주의 블록이 붕괴하면서 변질됐다. 무모하게 반미와 반서구를 부르짖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공공연히 지원하면서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히고 경제제재도 받게 됐다. 국민들은 고통과 불만을 토로했고, 카다피는 가혹한 통제와 검열, 야당 인사에 대한 탄압으로 맞섰다. 가장 큰 정권 위협세력인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을 감금하고 추방해 버렸다. 알 카에다가 카다피의 목숨을 노리는 배경이 됐다. 결국 카다피는 1980년대 이후부터 서방세계와 이슬람 세계 모두에게 적으로 남았다. 아프리카와 일부 라틴아메리카의 닮은꼴 지도자의 지지가 있었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향연에 불과했다.

최근 20년, 독선과 아집의 전형

이처럼 카다피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혁명 초기 20년 동안의 두터운 국민적 지지와 최근 20년간의 독선과 아집으로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독재자라는 명암의 두 축을 갖고 있다. 적어도 리비아에는 절망의 시기에 희망의 빛을 준 카다피에 대한 충성스러운 국민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카다피 붕괴를 속단하던 서구가 놓친 부분이다.

그러나 국민들을 학살하는 카다피가 물러설 곳은 더 이상 없다. 충성파 국민들이 혁명 지도자의 과거 영광을 기억한다 해도, 옆에서 죽어가는 가족과 이웃들의 학살에 더 이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직접 군사개입을 한다면 리비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아랍연맹이나 중립적 국가들이 중재에 나서 당사자 사이의 협상을 통해 카다피 출구전략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물론 카다피의 범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무리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리비아 내전과 시민학살은 너무나 끔찍해 민주화 투쟁 이후가 더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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