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메모]사건기자 그만하라는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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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기자메모]사건기자 그만하라는 대사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5. 20.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이후 언론 접촉을 극구 피하던 주미 한국대사관이 16일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자료를 보내왔다. 지난 8일 박근혜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싱크탱크의 분석이었다.


한국 대통령의 의회 연설은 이번이 6번째로 한국이 동맹국 중 최상의 반열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일본은 한차례도 하지 못했다는 비교가 들어 있었다. 이날 일부 특파원들은 대사관 고위 관계자로부터 “그동안 사건기자 노릇 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외교를 이야기하는 게 어떻냐”는 문자메시지도 받았다.


윤씨가 경찰을 피해 한국으로 급거 도주한 이후 대사관의 대미외교 업무는 사실상 마비됐다. 대통령 방미 결과에 대한 설명은 물론 한·미 정상회담 후속조치도 손을 못대고 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이번 사건의 중심에 대사관과 워싱턴 한국문화원이 자리잡고 있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의혹의 포인트는 3가지다. 윤씨의 성추행 의혹, 청와대의 윤씨 도주 과정 개입 의혹, 미국 공관의 성추행 신고 은폐시도 의혹이다. 이 가운데 성추행 의혹을 가리는 것은 미국 경찰의 몫이며, 나머지는 한국 정부의 대국민 의무다. 그런데 미국 경찰은 신속하게 사건 수사에 착수한 반면 청와대와 대사관은 진상 규명 의지가 없다. 청와대는 윤씨가 수배 중이 아닌 상태에서 귀국한 것이므로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법이 아닌 것은 맞다. 하지만 법적으로 하자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잡범들에게 수임료를 받고 법망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막장 변호사들 입에서나 나올 말이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일하는 관리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다.


문화원과 대사관 관계자들은 윤씨 사건 이후 언론과의 연락을 끊었다. 문화원이 윤씨 도주를 적극 도운 정황이 드러나고 성추행 피해여성 인턴의 거듭된 신고와 호소를 묵살했다는 의혹이 연일 제기됐지만 말 바꾸기와 부인으로 일관할 뿐,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한 번도 내놓지 못했다. 그래놓고는 이제 성추행은 잊고 대통령 방미 성과나 홍보해달라고 한다.


이 문제는 버틴다고 가라앉을 일도 아니고 그대로 묻어둬서도 안되는 일이다. 스스로 밝힐 의지가 없다면 감찰을 통해서라도 규명해야 할 국가적 의혹이다. 한 여성의 인권을 짓밟고, 교민사회를 온통 적으로 만들고, 국민적 자긍심에 먹칠을 한 이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는 것보다 사진찍기 이벤트와 덕담 주고받기로 점철된 정상회담 결과를 홍보하는 것이 더 급한가. 


특파원들도 경찰서 드나들고 목격자 찾아다니는 고달픈 사건기자 노릇 그만하고 특파원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



워싱턴 | 유신모 특파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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