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협정 개정보다 먼저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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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원자력협정 개정보다 먼저 할 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5. 2.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한국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파이로프로세싱 도입을 강력 주장하는 국내 전문가가 발표를 한 적이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핵확산 우려가 없고 핵폐기물을 대폭 줄일 수 있으며, 공정이 간단해 핵물질 전용을 감시하기 위한 세이프가드도 용이하다는 ‘예찬론’이었다. 


한 참석자가 “파이로프로세싱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게 그토록 명백하다면 왜 한·미 원자력협정이 잘 안되느냐. 미국이 바보인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래서 대중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왜 독재시대 권위주의적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중교육’이라는 용어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취지는 파이로프로세싱에 대한 긍정적 여론 조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가 여론을 조성해 밀어붙일 일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대중교육’이 이미 조직적으로 이뤄져왔다. 2011년 4월 한·미의 핵연료주기 공동연구 합의를 알리는 정부 보도자료는 파이로프로세싱에 대한 장밋빛 선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핵확산 우려가 없고, 방사성 독성은 1000분의 1로 줄인다는 것이다. 현재 보관 중인 사용후 핵연료를 재활용해 원전 20기를 120년 동안 가동할 수 있다는 황당한 설명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파이로프로세싱은 여전히 핵확산 문제를 안고 있으며, 고속로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설명은 없었다. 고속로 개발이 성공할지, 언제 가능할지, 얼마나 많은 국민세금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설명도 물론 없었다. 


이 같은 주장이 ‘대중교육이 안된’ 미국에 먹힐 리가 없다.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의 효과적 관리, 핵연료의 안정적 공급, 원전 수출력 제고 등을 원자력협정 개정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모두 농축·재처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사용후 핵연료 포화 문제는 파이로프로세싱이 아니라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확보해야 풀린다. 협정과 무관한 국내 문제다. 폐기물 문제를 해결 못하는 것은 미국 때문이 아니라 국내적으로 이 문제와 맞닥뜨릴 정치적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핵연료 공급도 직접 농축이 아닌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고, 원전 수출력 제고는 농축·재처리보다 미국의 수출 동의 절차 간소화가 핵심이다. 


하지만 ‘대중교육’에 세뇌된 국내 보수세력은 한국 원자력계가 가진 문제의 책임을 미국에 묻고 있다. ‘미국이 재처리를 못하게 해 원전 가동이 중단될 지경’이라는 이치에 닿지 않는 불만과 ‘농축·재처리 허용 여부가 미국이 한국을 동맹국으로 여기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라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협박성 비분강개가 터져나온다. 전 세계에 사용후 핵연료 포화로 원전 가동이 중단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또 사용후 핵연료 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안고 있는 것이지만 재처리로 이를 풀겠다는 나라도 없다.


정부는 원자력계가 주도한 ‘대중교육’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내 전문가들이 제공한 논리를 갖고 협상장에 나갔다가 미국에 망신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실관계를 바로잡지 않는다. 정부는 왜 원자력계의 허황된 주장에 침묵을 지키는지, 잘못 조성된 여론이 한·미관계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왔음에도 왜 수수방관하는지, 농축·재처리가 대관절 뭐길래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원자력협정 협상 시한이 연기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먼저 정부는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고 사용후 핵연료 문제에 대한 국내적 논의를 진지하게 시작해야 한다. 이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저절로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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