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원자력협정’ 제로섬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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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한·미 원자력협정’ 제로섬 아니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4. 11.

요즘 한국에서 ‘농축 및 재처리’가 뜨거운 이슈로 급부상하고 있다. 농축은 원전 핵연료 제조를 위한 우라늄 농축활동을 뜻하는 말이고, 재처리는 사용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농축·재처리는 현재 한·미 간 최대 현안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인식된다. 한국은 1974년 체결된 현행 협정에 따라 농축·재처리를 사실상 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이번 개정 협상에서 지난 4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 원자력의 위상에 걸맞게 이 같은 조항이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농축·재처리가 지나치게 부각돼 마치 이것이 원자력협정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고 국내적 논의는 본질과 무관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전 청와대 무궁화실에서 밥 코커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간사(오른쪽)를 접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내 전문가·정치인·언론은 한목소리로 미국이 외국과의 핵협정에서 농축·재처리를 일절 불허하는 ‘골드스탠더드’를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과 일전을 불사하더라도 농축·재처리 권리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주문에는 주권회복 운동이라도 벌이는 듯한 비장감이 흐른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대결적 사안이 아니다. 특히 농축·재처리는 한·미가 하나의 공을 앞에 놓고 서로 갖기 위해 다투는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또한 농축·재처리 권리는 미국이 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든 나라가 갖고 있는 것이다. 현행 협정도 한국은 비확산 규범을 준수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에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 미국이 외국과의 협정에서 골드스탠더드를 일괄 적용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골드스탠더드를 정책으로 채택한 적이 없다. 이는 국내에 핵무장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핵무장을 정책적으로 추진한다고 단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속으로야 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이 바보가 아닐진대 하자 있는 상품을 강매하다가 시장을 다른 나라에 모두 뺏기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비확산체제 유지에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미국도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 아니고 한국도 당장 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니 협상이 가능하다.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해 한국의 권리 행사에 조건을 다는 형식으로 합의할 수 있다. 지금 진행 중인 협상도 농축·재처리 권리를 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권리 행사를 위한 조건을 얼마나 유연하게 만드느냐가 핵심이다. 원자력협정 개정의 목표가 농축·재처리 권리를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핵연료 공급과 사용후 핵연료 처분을 위한 장기적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본래 목표다. 농축·재처리는 이를 위한 여러 방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농축·재처리만 고집하는 것은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는 본말전도일 뿐 아니라 한국이 핵무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원자력협정이 한·미 관계를 흔드는 요인이 되도록 방치한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이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과 한국 원자력계의 현실, 국익과 정부의 지향점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 합리적인 공감대 위에서 협상을 추진해야 했다. 지금도 정부는 ‘사용후 핵연료 저장시설이 포화상태인데 미국이 재처리를 못하게 해 원전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는 식의 황당한 괴담이 유력 정치인들의 입과 언론 사설을 통해 버젓이 유포되고 있는데도 이를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국민 여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된 데는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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