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판 ‘방코르’의 창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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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판 ‘방코르’의 창설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8. 23.

미국 뉴욕 주식시장이 반등세를 보이면서 세계 동시 주가폭락 사태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미 달러화로부터의 이탈은 수습되지 않고, 한국의 주식시장도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미 달러화라는 일국의 통화를 기축으로 하는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의 이완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금과 태환성을 유지해온 미 달러화를 기축으로 번영을 구가해왔다. 냉전의 굴레에 놓인 한국도 그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1971년 ‘닉슨 쇼크’로 브레턴우즈 체제에 균열이 발생했다.

달러와 금 간의 태환이 정지되자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이 불가피했다. 베트남 전쟁 등의 방대한 전비 지출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부풀어 오르면서 달러는 금과의 태환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최근의 미 국채 신용등급 강등과 달러 이탈의 징후가 당시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40년간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역할은 점점 줄어든 반면 신흥국들이 급속히 대두하면서 다극화는 불가피한 흐름이 됐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다극화되는 세계경제 사이의 틈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금융시장의 혼란은 이를 시사하는 시그널이다. 이런 혼란상을 일찌감치 내다보고 세계 공통의 통화 창출을 제안했던 이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한 케인스는 금을 비롯한 30종류의 기초자산을 토대로 한 국제통화 ‘방코르(Bancor)’의 창설과 신용창조 기능을 갖는 국제중앙은행의 설립을 제창했다. 

하지만 케인스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대신 단기자금의 융자를 담당하는 IMF와 미 달러화를 기축으로 하는 통화제도가 성립되었다. 

케인스가 구상한 ‘방코르’는 1967년 열린 IMF 총회에서 특별인출권(SDR)이 도입되면서 일부 실현되었다. IMF의 출자금과 비례해 배분되는 특별인출권은 주요 국제통화의 가중평균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만큼 세계무역 및 금융거래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혼란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궤도 수정을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 ‘방코르’ 같은 새로운 국제통화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G20의 논의에서도 현대판 ‘방코르’의 창설과 IMF의 개혁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동요가 되풀이될 경우 외환안정을 기반으로 수출에 의존해온 한국 경제는 타격이 불가피해진다.

대안은 없을까. 당분간 달러화를 대체할 만한 기축통화가 없는 만큼 세계 각국이 달러를 떠받치기 위해 협력하는 것외에 방법이 없다. 다만, 각국은 외화준비금에서 달러 비중을 줄이며 외화의 분산을 꾀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완화 정책으로 갈 곳이 없는 투기자금이 신흥국에 유입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면 신흥국들은 금융긴축에 나서야 할 것이고, 이는 신흥국 경기 악화로 이어져 한국과 같은 수출주도형 경제를 냉각시킬 수도 있다. 요컨대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종래의 통화제도가 유지되는 한 세계경제에서 ‘부(負)의 사슬’을 절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외환을 안정시키고 실물경제를 제대로 반영하는 통화제도의 창설은 필수불가결하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이 실현가능한 구상이 될 수 있다. 이 구상은 일본이 1997년 아시아 통화위기를 계기로 제창한 바 있다. 거품경제 붕괴 전의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지금과 달리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은 엔화의 압도적인 신용력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엔화경제권’ 구상으로 비쳐졌고 미국은 물론 한국과 중국으로부터도 불신을 초래해 좌초했다. 

하지만 2005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회의에서 역내 금융위기 예방시스템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합의됐고 이는 역내 협력체제로 발전하게 됐다. 일본은 거품경제 붕괴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예전과 같은 여력은 없지만, 대신 중국 경제가 약진하고 있고, 한국 경제도 활황을 보이고 있다. 한·중이 일본, 아세안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 다극화와 상호의존을 심화하는 견인차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역내 무역과 투자, 금융의 상호의존이 심화되는 흐름을 고려하면 동아시아판 ‘방코르’의 창설 필요성이 필연적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판 ‘방코르’는 달러화를 대체한다기보다는 이를 보완하면서 동아시아의 역내 무역과 금융 확대를 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경제대국 일본, 중국과 이웃한 무역국가 한국에도 의미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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