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트와 그레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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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리퍼트와 그레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3. 10.

도널드 그레그가 주한 미국대사 부임 직후인 1990년 1월 광주를 방문했을 때 “사과하러 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의혹 때문에 광주 미 문화원 앞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반미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이 사과할 게 있다면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한 것이다.” 그레그의 이 말이 전해지자 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 6명이 그레그에게 만남을 청했다.

3시간 면담에서 시민들은 인공위성으로 작은 물체까지 식별하는 미국이 광주에서 학살 명령이 내려지는 과정을 몰랐을 리 없다고 따졌다. 그레그는 “미국 인공위성 성능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 마음속까지 보지는 못한다. 그 과정은 (학살을 지시한) 한국인들만 정확히 알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레이건이 1981년 취임 후 첫 외국정상 방문자로 전두환을 받아준 것은 광주학살을 승인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레그는 레이건이 전두환을 일찍 받아준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전두환으로부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사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그레그는 이들의 반미감정에는 ‘왜 미국은 그때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았느냐’는 배신감이 서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한국 민중의 한(恨)과 연결지었다. 그레그는 광주 시민들에게서 느낀 감정과 비슷한 인상을 2002년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도 받았다. 전쟁 이후 반세기 이상 핵무기를 가진 미군과 대치해온 북한이 미국의 ‘적대정책’을 비난하며 악을 써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광주 시민들과 터놓고 대화한 것만으로 서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어졌듯이 북한 사람들 역시 만나서 얘기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 후로 그는 한반도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80년대 한 학교 정문에 그레그 주한미대사의 취임을 반대하는 대자보가 붙여 있다. (출처 : 경향DB)


그레그가 지난해 펴낸 회고록 <도자기 조각들>에는 한 미국대사가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현장의 판단은 워싱턴 판단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레그는 노태우 정부와 협력해 1992년 한·미 연합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당시 국방장관 딕 체니 등 강경파들 주장에 밀려 1년 만에 훈련이 재개된 것을 지금도 통탄한다. 그때 미국이 좀 더 훈련을 중단하고 북한을 교차승인했더라면….

이후 한국 내 대북정책에 대한 좌우갈등은 더 첨예해졌고 이제 미국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됐다. 사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왜 한반도 분단이 지금처럼 고착화됐는지 잘 모른다. 이번에 봉변을 당한 마크 리퍼트 대사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런 리퍼트가 불쾌한 경험을 한 직후 이 사건이 한·미관계 전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프로페셔널리즘을 발휘하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는 쇄도하는 병문안을 받는 와중에도 왜 그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그가 돈 오버도퍼, 로버트 칼린이 쓴 <두개의 한국>을 병실에서 읽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그를 다시 보게 된다. 이 책은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문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서술한 책이다. 부임 한달 만에 대학생들에게 대사관저를 점거당해 잠옷바람으로 도망친 그레그도 의연한 후배를 칭찬하며 기대감을 표했다.

초유의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대사 칼부림 사건이 충격이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한국인들의 기묘한 사과 행렬에도 입이 딱 벌어진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한 전문가는 “미국은 이번 일로 연일 사과하는 한국 보수진영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이 그들 바람대로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박근혜 정권이 김기종씨에게 적용하려고 골몰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이런 입장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우려한다.” 한국계 미국인 신은미씨가 지난 1월 한국의 한 우파청년에게 공격당한 뒤 도리어 국가보안법 조사를 받다가 추방됐을 때 국무부 대변인이 한 얘기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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