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러운 ‘미의 중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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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안쓰러운 ‘미의 중 견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3. 31.

“최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 재계 지도자들이 세계 1위 투자처는 더 이상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선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난해 의회 신년 국정연설 때 민주, 공화 양당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며 길게 박수를 친 대목은 미국이 중국보다 매력적인 투자처라고 얘기할 때였다.

미국 엘리트들의 중국에 대한 경계심 또는 위기감은 이렇게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런데 최근 중국 주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한 미국의 방해 시도에서는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지난해 한국, 호주 등 고분고분한 동맹국들에 AIIB 가입을 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31일 마감된 AIIB 창립 회원국 신청에 45개국이 참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호주, 인도 등 아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외교의 기본이 어디에 가서 따돌림당하지 않는 데 있다면, 이번 일은 미국 외교 역사상 보기 드문 완패라고 할 수 있다.

AIIB 설립에 대한 미·중 간 팽팽하던 균형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 영국의 참여 선언으로 깨졌다.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5월7일 총선에서 노동당에 정권을 내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AIIB 참여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캐머런 나름대로 영·미관계가 이 정도 일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대신 중국시장은 포기하기에 영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오바마뿐 아니라 캐머런에게도 국내 정치·경제적 이유로 ‘피벗투아시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 같은 어중간한 나라들은 미국 눈치를 덜 봐도 됐고 결국 미국을 버리고 AIIB 막차에 올라탔다.

최희남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이 27일 오전 부산 벡스코에서 우리나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미국의 AIIB 방해 전략은 사실 미국 내에서도 컨센서스가 없는 것이었다. 지난해 백악관이 한국 등의 AIIB 가입을 공개적으로 주저앉히려 했을 때 미국의 한 동북아 전문가는 “중국이 남아도는 돈으로 항공모함을 더 만드는 것보다 개도국 경제와 개발에 쓰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으냐”고 했다. 그런 의견은 재무부나 원조기관 등에서도 개진됐다. 그럼에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중심으로 한 안보정책결정자들은 AIIB를 허용하면 미국 중심 헤게모니가 흔들린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렸고 거칠게 밀어붙였다. 미국이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시도와 달리 중국 고립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지만 미국 전략가들의 머릿속에는 아직 냉전이 자리하고 있다.

워싱턴에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본부가 있듯 이제 베이징에 AIIB 본부가 들어설 것이다. 세계은행, IMF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 국제 경제 질서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큰 변화다. 5월 IMF 총회에서는 중국 위안화를 달러·유로·파운드·엔화에 이어 특별인출권(SDR)에 포함하려는 의제를 놓고 AIIB 2라운드가 벌어질 예정인데, 어느 때보다 위안화의 SDR 포함 가능성이 높다.

미국 내에서는 ‘2위 국가’의 지위를 준비하자는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내려가는 것의 좋은 점: 왜 나머지 세계의 부상이 서방에 좋은가(The Upside of Down: Why the Rise of the Rest Is Good for the West)>라는 책을 출간한 찰스 케니 글로벌개발센터(CGD)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GDP 1위 국가를 천년만년 유지한다고 해서 미국인 개인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오히려 1위 국가의 지위가 끝나간다는 사실은 미국 밖 다른 지역이 더 부유하고, 민주적이며, 안전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미국이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워싱턴 내에서 귓전으로 듣는 사람이 더 많다. 이번 일을 보며 든 생각은 미국이 세상의 큰 흐름을 늦추려 할수록 자신의 쇠퇴 속도가 재촉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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