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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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시민의 의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4. 21.

최근 미국에서 시민적 의무와 관련해 흥미로운 뉴스가 두 건 있었다.

하나는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60)이 배심원 의무 이행명령을 통보 받고 메릴랜드주의 한 법정에 출석했다는 뉴스였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거주지가 워싱턴 인근인 로버츠 대법원장은 15일 아침 교통사고 관련 민사사건에 배심원 후보로 참석했다. 재판에 앞서 재판장이 기피 사유가 있는 배심원들을 가려내기 위해 친척들 중 간호사나 교통사고 조사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49번 배심원’ 로버츠는 손을 들고 간호사 여동생, 교통사고 조사업무 종사자 처남 얘기를 했지만 다른 주에 산다는 등의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장은 49번 배심원을 따로 불렀다. 재판장은 “이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논의해봤다. 우리는 당신 직업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배심원 기피 대상으로 인정 받고 대법원으로 뒤늦은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변호사들은 법리를 잘 안다는 점에서 종종 배심원 기피 대상으로 인정 받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시민들의 상식에 바탕한 배심재판의 취지를 흐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일단 배심원 후보로 무작위 선정되면 법정에 나가 소명해야 한다.

배심원의 의무는 부름을 받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으로 치면 국방의 의무나 예비군 소집에 해당한다. 하지만 ‘배심원 면제 받는 요령’이 떠도는 것을 보면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에게 이 의무는 기피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사법부 수장도 시민적 의무의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이 뉴스는, 아마도 사법부 측의 시민교육 의도가 작용해 공개됐겠지만 많은 미국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모양이다. ‘기왕이면 배심원으로 끝까지 참석했다면 대법원장 본인에게 교육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말이다.

미국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앞에서 NSA 반대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이 데니스 쿠치니치 전 민주당 하원의원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단에는 ‘우리는 대량 감청을 멈출 수 있다. 헌법의 권리를 지키자’라고 적혀 있고 왼쪽에 무인공격기 드론 모형이 보인다. _ AP연합


같은 날 오후 연방의회 앞에 떨어진 1인승 프로펠러기 사건은 헨리 데이빗 소로에서 이어져내려온 시민불복종의 전통을 보여준 사례였다. 플로리다의 집배원 더글러스 휴즈(61)는 미 우정청 로고가 선명한 이 프로펠러기에 몸을 실어 의회에 우편물을 배달하려 했다. 151년 전 링컨 연설로 유명한 게티스버그에서 이륙해 의회 앞에 착륙한 그가 운반한 우편물은 연방 상·하원 의원들에게 줄 535장의 편지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민심은 연방정부가 부패했고 의회가 최대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유권자로서 의회에 대해 권한을 가진 유일한 정치적 실체의 구성원이다. 나는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정신에 기초해 개혁을 요구하고 유권자 반란을 선언한다. 여러분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부패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것, 개혁은 미루면서 부패에 반대하는 척하는 것, 진정한 개혁에 적극 동참하는 것.”

휴즈는 민주주의클럽이란 블로그에 자기 주장과 1인시위 비행을 예고했다. 그는 기업들이 의원들에게 주는 정치자금, 퇴직 후 로비스트로 변신하는 의원들의 관행 등이 사실상 ‘합법적 뇌물’이라며 정치인들과 정치자금 사이에 거대한 차단벽을 만들고 풀뿌리 시민 헌금으로만 정치를 하도록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휴즈는 비행금지구역 위반, 미등록항공기 운전 등 경범죄로 조사 받고 귀가해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고 있다. 그는 며칠 뒤 자신을 찾아온 언론들에 탄식조로 말했다. “내가 전하려던 정치자금 개혁 메시지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워싱턴 상공 보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만 가득할 뿐이니….” 사건 발생 직후 그를 옹호하는 주변인들 사이에 ‘휴즈는 진정한 애국자’라는 얘기가 나왔다. ‘애국자가 맞느냐’는 한 기자의 반복된 물음에 그는 답했다. “나는… 집배원일 뿐이요.” 두 사람 중 시민적 의무를 이행한 사람은 누구이고, 이행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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