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보다 더 얄미운 ‘마초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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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성추행보다 더 얄미운 ‘마초이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5. 26.
뉴욕의 한 호텔에서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에 가장 가까이 가 있었던 남자가 강간미수혐의로 체포됐다. 이 명백한 정치적 자살행위는 차분하고 한가로운 프랑스 일요일 아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건 직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프랑스인들의 65%는 재판결과와 무관하게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DSK)의 대선은 물건너갔다고 답함으로써 사건이 던진 거대한 파장을 입증했다. 발생 후 2주가 지났지만 여전히 뉴스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은 이 사건은 다양한 방식으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내년 대선 승리를 거의 다 손에 쥐었다고 믿어왔던 사회당에선 이 사건을 프랑스인 전체의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차가운 감옥에 처참하게 갇혀있는 그를 향한 ‘연대’의 충정을 서둘러 표했고, 그의 가족을 향한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프랑스 여성들이 파리에서 스트로스 칸 전 IMF 총재 옹호 발언 관련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경향신문 DB

적어도 사회당 내에서 그의 부주의함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일체 흘러나오지 않았다. 사르코지를 공격하던 많은 언론들은 DSK의 행위와 무관하게 이 아까운 인재를 놓치게 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했다. 각종 음모론이 쏟아져 나왔다. 일각에선 100만달러의 보석금과 500만달러의 보증금을 받고 그를 감옥에서 놓아준, 장사치에 가까운 미국의 사법 시스템에 격한 비난을 가하기도 했으며, 그가 감옥을 떠나 머무는 아파트의 월세가 3만5000유로에 달한다는 사실에 소위 사회당 출신인 백만장자 정치인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프랑스 주류 언론들이 드러내는 여러 반응들에서 지속적으로 간과되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는, DSK가 가해자고 피해자는 호텔 청소부라는 사실이다. 재판결과가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설사 강간이었다 해도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논조가 여과없이 흘러나왔다. 시사주간지 ‘마리안’의 발행인 장 프랑수와 칸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녀 치마들추기 정도의 일일 뿐”이라는 발언으로 공분을 샀고, 사회당 지도부의 자크 랑은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라는 발언으로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 한다는 구설에 휩싸였다. 전 대선후보 장 피에르 셰벤망은 이 사건을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함으로써 마치 유대인인 DSK가 억울한 누명이라도 쓰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소위 정계와 언론계,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로 DSK에 닥친 이 재앙 -그가 수치스럽게 능욕한 한 여인이 아니라 -을 말하는 이 정경은 부르주아 남성집단의 메스꺼운 자가당착을 찬란하게 펼쳐보였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흐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지독한 성차별적 논조에 경각을 울리는 집회가 지난 주말에 열렸다. 3000여명의 여성들은 “우린 모두 하녀다”, “성차별적 보도, 중단하라”를 외치며 프랑스 정가와 언론가에 만연한 마초근성을 고발했다.

정치인의 사생활은 쿨하게 내버려두는 프랑스적 전통은 그것이 강제성을 띤 범죄인 경우에까지 관대함의 영역을 넓히려 하다가, 여성들의 호된 질책에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마리안 발행인 장 프랑수와 칸은 자신의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즉각적인 사직과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말 실수로 호된 비난을 들은 자크 랑도 공식적으로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적어도 프랑스 여성들 입장에서 정말로 중요한 사건은 2주 전 소피텔 호텔 스위트룸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 거침없이 흘러나온 마초들의 입을 통해 벌어졌다. 페미니즘은 아무도 죽인 적이 없지만, 거친 마초주의는 끊임없이 여자들을 죽인다.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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