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비핵화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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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비핵화의 덫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9. 11.

미국과 북한 간 지루한 비핵화 협상을 지켜보며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 18년 전 이맘때 방영된 미니시리즈 <가을동화>에서 원빈이 송혜교에게 “사랑? 웃기지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고 하자, 송혜교는 창백한 얼굴로 “얼마…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나… 돈 필요해요. 정말 많이 필요해요”라고 말하곤 도망치듯 방을 뛰쳐나간다.

 

이번 9·9절 행사에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등장시키지 않은 북한이 핵포기 대가로 얼마를 받으려고 할까. 2012년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핵개발에 11억~15억달러, 미사일 개발에 17억4000만달러, 총 28억~32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지금까지 100억달러 이상을 투입했을 것이라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심지어 북한이 핵개발로 잃어버린 기회비용까지 요구할 것임을 감안하면 비핵화 비용 최대 추정치가 2조달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북한이 지난 9일 정권수립 70주년(9·9절)을 맞아 평양 5월1일 경기장에서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개막 공연이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보도했다. 인간 카드섹션으로 만든 ‘조선아 영원무궁 만만세’ 문구가 보인다. 연합뉴스

 

금권정치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돈은 복음이자 만능의 보검이다. 민주주의, 언론자유, 인권 등 미국의 전통적 가치들도 물신화된 ‘아메리카 퍼스트’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다. 충동적 분노의 화신은 자신의 믿음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비핵화도 (한국과 일본이 내는) 돈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트럼프 특유의 즉흥적 도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판돈이 올라간 싱가포르 선언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도 2차 방북(5·9) 후 미국 CBS 방송 인터뷰(5·13)를 통해 비핵화를 할 경우 제재를 풀어 민간자본이 북한에 유입되어 주민들도 고기를 먹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에게는 자본주의 심장부 뉴욕의 휘황찬란한 스카이라인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듯 오만한 부자는 빈자(貧者)에게 ‘아메리칸드림’을 집요하게 설파하지만 ‘주체 조선’은 요지부동이다.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을 기념해 9일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전투기가 불꽃으로 숫자 70을 형상화하고 있다. 평양 _ AP연합뉴스

 

그렇다고 강대국을 감정만으로 대할 순 없는 일. 때로는 굴욕적 감정조차 속으로 삼킨 채 짐짓 실사구시적 행동을 해야 하는 게 곤핍한 북한의 운명이자 비애임을 김정은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궁핍한 세습 독재국가가 고진(苦盡) 끝에 낳은 자식인 핵무기는 비현실적이다. ‘절대무기’가 북한의 미래를 밝힐 등불이 되리라 믿는 것은 환상이다. 북한 희망의 빛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히 연소시켜 나오는 에너지로만 밝힐 수가 있다. 관건은 전인미답 비핵화의 길로 북한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이다.

 

우선은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일이다. 물론 조건이 있다. 북한의 핵물질 생산 동결과 일체의 핵·미사일 시험 및 발사 중지 그리고 이에 대한 충분한 검증 수용 등 ‘선행비핵화’ 조치와 맞바꾸는 일이다. 선행 조치에 대한 검증은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다. 연락사무소가 설치된다면 북한에는 ‘승냥이 미제국주의’가 사라지고, 북한으로 흘러가는 개혁·개방의 수문을 열 수 있다. 미국으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또 있다. 종전선언이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와 무관함을, 그리고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동 종전선언이 유효함을 합의문에 넣어 서명하는 일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설’만으로는 부족하다. 문 정부가 4·27 판문점선언에 애써 국회 비준이라는 대못을 박으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국가 간에 말(言)이라는 것도 관계가 좋을 때만 통할 뿐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다.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합의문서라도 남아야 그걸로 남북 간 신뢰의 싹이 튼다. 이는 김 위원장의 비장하고 담대한 용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역사는 가끔 어떤 문제의 해법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에다 얄궂게 던져놓곤 한다. 기다림이 점차 위험해지고 있다. 비핵화가 딱 그 모양이다. 결국 문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착된다. 역사만을 생각하겠다는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못할 것도 없다. 정권만을 생각했다면 지난봄 판문점선언과 같은 드라마는 쓸 수가 없었다. 가을에 또 하나의 동화 같은 극적인 합의를 기대한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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