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비핵화, 서둘지 말고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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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비핵화, 서둘지 말고 집중하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7. 2.

문재인 대통령은 국내외 통신사들의 서면인터뷰(6·26)에서 영변이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평가했다(청와대는 하루 뒤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가는 입구’라고 수정). 작년 11월 조윤제 주미대사가 영변 핵시설만이라도 서로 합의하고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하자고 일찌감치 ‘애드벌룬’을 띄울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발언이 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부 미국 전문가들은 “핵 목록이나 신고가 없는 상황에서 영변 핵폐기를 핵프로그램 폐기라고 볼 수 없다”부터 “영변 비핵화로는 북한의 핵무기 생산 중단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 “전체 핵신고가 필수”라는 주장 등을 제기했다. 어떤 이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의 핵개발 상황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분명히 하자. 문 대통령의 답변이 비현실적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작년 6월 “(북한의) 비핵화가 20% 완료된다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25년 전 클린턴 행정부는 순항미사일로 영변 핵시설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또 있다. 2008년 5월 북한이 미국에 건넨 영변 관련 서류(1만8000쪽 분량)에서 극미량의 고농축우라늄(HEU)이 발견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영변은 북핵 프로그램의 과거와 현재를 해독할 수 있는 ‘로제타 스톤’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 7월 1일 (출처:경향신문DB)


그럼에도 영변만으로 북한 비핵화가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는 없다. 다만 임기 5년 내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내가 만나본 미국 전문가들 모두 트럼프 임기 내에 완전한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유엔 회원국이자 엄연한 주권국가인 북한을 패전국처럼 다루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같은 ‘슈퍼 매파’(super hawk)가 아니라면 말이다. 더군다나 집권 8년차 김정은으로서는 3년도 채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 내년 재선이 불투명한 트럼프에게 미리 ‘발가벗고’ 나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중국이라는 뒷배가 있기에 영변을 잘 포장하여 그럭저럭 견디면서 후일을 도모할 거라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영변의 불능화가 불가역적으로 이뤄진다면 ‘미니 비핵화’를 이루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마침 지난주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와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서 발표자로 나선 문주현 교수(단국대 원자력융합공학과)는 자신의 최근 논문을 토대로 영변 핵시설의 가치를 기술적으로 세밀하게 평가했다. 문 교수의 논거는 북핵 시설을 지속적으로 관찰해 온 안진수 전 원자력통제기술원 책임연구원의 연구 성과와도 궤를 같이했다. 첫째, 영변 내 핵심시설인 5㎿ 원자로와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을 폐기할 경우 연간 20kt(킬로톤=100t)급 플루토늄 핵무기 1기 분량의 핵물질 생산을 중단하는 효과가 있다. 둘째, HEU를 생산하는 원심분리기가 영변 내에 있기에 20kt급 우라늄 핵폭탄 2~3기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 소멸한다. 셋째, 우라늄 농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체 상태의 육불화우라늄 생산시설 역시 영변에 있으므로 농축 중단 효과도 있다. 넷째, HEU를 핵연료로 사용하는 연구용 원자로 IRT-2000도 영변에 있으므로 IRT-2000에 핵연료 공급을 할 수가 없어 IRT-2000을 이용하여 생산하는 삼중수소(증폭핵분열폭탄과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 등 핵무기 고도화에 필요한 물질생산도 중단된다. 이는 삼중수소를 주기적으로 보충해야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증폭핵분열탄이나 수소탄이 자칫 ‘고철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영변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의 선이후난(先易後難) 접근법의 하나다. 김정은도 작년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제는 미국이 관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연락사무소 개설 등 영변 비핵화에 비례적이고 등가적인 조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때다. 리얼리티쇼는 한번으로 족하다.


<이병철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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