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 비처럼 쏟아진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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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스테판 에셀, 비처럼 쏟아진 오마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3. 5.

목수정 | 작가, 파리 거주


 

<분노하라>의 작가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그를 향한 오마주가 프랑스 전역에 비처럼 쏟아졌다. 95년 동안 행복하고 환하게 타오르던 그 촛불이 꺼진 자리는 컸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메우느라 저마다 촛불을 하나씩 켜들었다. 지난 3년간,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이 남자는 가장 많은 사랑과 희망을 건네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죽은 날 바스티유 광장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고, 신문지면들은 온통 이 놀라운 인물의 생에 대한 저마다의 애틋한 술회로 넘쳐났다.


1917년 베를린생. 7살에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절친과 사랑에 빠져, 그가 살고 있는 파리로 이주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했고, 두 남자 사이의 우정은 건재했다. 영화 <줄과 짐>을 통해 전설이 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을 부모로 둔 스테판 에셀에게, ‘질투하지 않는 충만한 사랑’은 필생의 가르침이었다. 18살에 프랑스 국적을 얻고, 에콜노말에서 공부한 직후, 2차대전이 발발한다. 나치라는 반이성이 유럽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주저없이 드골을 따라 레지스탕스가 되는 길에 나선다. 나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갔던 그는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해방된 프랑스에서 외교관이 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 (경향신문DB)


이후 그의 인생은 더 많은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한 투쟁의 삶이었다. 외교관으로서 그가 시도한 대부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들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은퇴 이후 본격적으로 인권운동가, 환경운동가로서 활약하면서도 실패는 더 익숙하게 찾아오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행복한 시지프스’가 될 것을 모두에게 말한다. 불의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행복할 수 없으며, 분노하는 것,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정치에 다시 ‘윤리’의 미덕을 구축한 사람, 분노해야 할 이유를 젊은 세대에게 일깨워준 거인,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된 사람, 우아한 삶과 투쟁하는 삶을 조화시킨 사람, 그리고 스스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의 전형이라고 하는 에셀은 말한다. “수조원을 소유한 사람들과 하루 1~2달러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우린 분노해야만 한다”고. 단지 좌파의 간판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뿐 아니라, 90이 넘은 레지스탕스 영웅도, <줄과 짐>의 아들도, 이토록 추하게 타락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함께 분노로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에서만 200만권이 팔린 <분노하라>(2010) 이후 그는 7권의 책을 더 써낸다. 마지막 책은 다음주 출간 예정인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 촛불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한 조각 행복의 밀알을 다음 세대에게 전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경이로움은 ‘사랑’이었다고 이 백전노장은 주저없이 말한다. “사랑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할 때,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내가 전 인생을 통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고, 그리고 언제나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하고, 행복을 주는 것. 내가 행복해짐으로써 남까지 행복하게 하는 것.” 강연 때마다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그가,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내기 위해 마음에 켜들었던 촛불은 어머니로부터 배운 시들이었다.


시와 사랑, 행복은 불의에 대한 분노와 자유·평화·인권을 위한 투쟁과 공존하는 것임을 눈부시게 일깨워준 이 영원한 젊음의 투사, 그의 향기로운 영혼이 천지에 온기를 불어넣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파리에 봄이 다가왔다. 봄 향기가 진동한다. 7일(현지시간) 스테판 에셀은 몽파르나스 묘지, 사르트르와 보봐르가 있는 그곳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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