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북한과 대화 ‘긴 숟가락’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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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워싱턴리포트]북한과 대화 ‘긴 숟가락’ 준비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8. 2.

‘악마와 식사를 하려면 긴 숟가락을 준비하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믿을 수 없는 상대는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상대가 악마처럼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면 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때로는 긴 숟가락을 갖고 가서라도 악마와 밥을 먹어야 할 경우가 있기에 이런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양국 간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지금,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또다시 북한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달 28~29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뉴욕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만났다. 2009년 12월 평양 회담이 이어진 모양새다. 그러나 이번 북·미회담은 1년7개월 전의 회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사이에 북한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설사 북한이 모든 핵을 포기한다고 약속하는 문서를 내밀어도 미국은 이제 서명할 수 없게 됐다. 플루토늄 시설이라면 북한의 약속 준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UEP는 검증이 불가능해서다. 미국이 북한의 말만 믿고 협상문서에 서명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한마디로 북한이 UEP를 공개하는 순간 ‘협상을 통한 비핵화’는 불가능한 일이 된 것이다.

미국이 지금 북한과 대화를 재개한 것은 북한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6자회담으로 이어가 비핵화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북한의 추가도발 방지와 국내정치적 필요성 등의 이유로 ‘긴 숟가락을 갖고’ 식탁에 마주앉았을 뿐이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클리퍼드 하트 미국 6자회담 특사와 악수하고 있다.


미국은 회담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북한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추측이 가능하다. 김 부상은 뉴욕에서 줄곧 북·미관계 개선을 말했다. 회담 하루 전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한반도가 아직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평화협정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신선호 유엔주재 북한대사는 같은 날 유엔에서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은 다른 핵 경쟁국에 대한 절대적 핵 우위를 얻기 위한 것으로 새로운 핵무기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미사일방어망은 핵 보유국이 아니면 관심 가질 일도,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국 신 대사는 “우리는 핵 보유국”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자명해진다. 김 부상은 보즈워스 대표에게 “핵을 가진 두 나라가 맞서고 있는 한반도의 긴장을 가라앉히고 전쟁상태를 종식시키지 않으면 핵 참화가 있어날 수 있으니 조속히 평화협정을 맺고 양국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북한에 미국은 모든 핵활동 및 미사일 실험발사 중단 등을 요구했다. 양측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이얼로그(대화)’가 아닌 ‘모놀로그(독백)’를 주고받은 셈이다. 이를 두고 김 부상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회담이 “건설적이고 실무적이었다”고 발표했다. 북한에 대한 여론이 최악인 점을 감안해 북한의 ‘험악한’ 주장이 공개되는 것을 막고, 여론을 달래가며 대화의 동력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김 부상의 미국 방문은 어쩌면 비핵화와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략적 인내’로 일관하던 미국의 정책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난관 속에서 까마득한 목표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미국의 시도가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긴 숟가락을 한 개 장만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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