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반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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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특파원 칼럼]배반의 정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8. 24.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소련과 중국은 공산주의 노선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었다. 흐루시초프는 자신을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나는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당신은 부르주아 출신”이라며 “우리에게는 분명한 출신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는 “우리에게 공통점도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자신의 출신계급을 배반했다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지금의 관점에서야 공산주의 이념과 출신계급을 논하는 것이 허망해 보이지만, 당시 저우언라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정치적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출신계층을 배반하는 정치 현상이 지금 미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정책의 방향은 그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 그는 왜 미국 유권자들이 대통령의 직위와 상·하원 다수당 지위를 한꺼번에 자신에게 주었는지를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

오바마는 지지자들의 희망을 저버리고 대기업·금융기관의 횡포와 경제적 불평등 심화를 방관 중이다. 그는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보건의료개혁법을 추진했으면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예산안도 받아들였다. 이민개혁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미국에서 추방당한 이민자의 수는 전임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보다 더 많다.
그는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미국 연안의 해저시추를 승인했다. 오바마는 경기부양책을 쓰면서 동시에 감세정책을 유지하는 모순을 보여줬다. 그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복지혜택을 축소하면서 동시에 세금을 더 걷는 ‘균형있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결국 그가 서명한 법안에는 복지 축소만 있을 뿐 증세는 없었다.

취임 전 오바마는 한계에 도달한 미국의 시스템을 바꾸려는 개혁가였다. 그의 당선이 미국의 사회적 갈등을 내포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주인이 된 뒤 오바마는 난관을 돌파하는 개혁가보다 ‘통합의 정치인’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여야를 초월해 모두의 지지를 받고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화당과 보수층으로부터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있다. 그의 지지자들 역시 2년6개월 동안 무수히 실망하고 분노했으며 결국은 체념했다. 그의 업무 수행 지지도는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미국 보수단체 ‘티파티’가 제작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히틀러, 레닌과 비교하는 광고물

출신을 배반한 것은 오바마만이 아니다. 보수주의 풀뿌리 운동단체인 ‘티파티’는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해달라고 거리로 나서는 역설을 실행에 옮겼다. 티파티는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서민층으로 이뤄져 있다. 오바마가 엄청난 세금을 자신들이 아닌 부실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투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시민운동이다. 이들은 재정적자 감축 협상에서 세금인상 없이 정부의 지출만을 축소하는 합의안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자 감세를 옹호하고 의료·교육·사회보장 등에 대한 정부 지출을 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상위 2% 백만장자의 이익을 지켜주고 정작 자신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과 복지는 취약하게 만들었다.

21세기 미국 정치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는 기막힌 배반과 역설의 광경은 미국이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평범한 시민들의 정당한 기대와 신념을 저버리는 배반의 정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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