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리포트] 비인도적인 美 ‘식량지원 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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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워싱턴리포트] 비인도적인 美 ‘식량지원 무기화’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4. 25.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이명박 정부에 발목이 잡혀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지원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 역시 식량지원에 관한 한 항상 인도주의적이진 않았다. 

세계 1차대전 직후인 1919년 기근에 허덕이던 독일이 미국에 식량지원을 요청했을 때 미국은 이를 독일과 소련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식량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첫번째 사례다. 이라크에 혹독한 경제제재가 가해지던 96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방송에 출연했다. 식량·의약품 부족으로 50만명의 어린이를 사망하게 만든 이라크 경제제재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2006년 미국이 테러단체로 규정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자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지 속에 가자지구로 반입되는 식량과 생필품을 봉쇄했다. ‘하늘만 열린 교도소’ 꼴이 된 가자에는 국제사회의 구호품도 전달되지 않았고 150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극도의 고통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지난해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박을 공격해 민간인을 살해했을 때도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이스라엘 규탄 결의안에 반대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이 “600만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긴급한 국제 식량지원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43만t의 식량지원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지 한달이 지났다. 그러나 대북 식량지원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국과 미국은 반응이 없다. 

반대론자들은 지원된 식량이 북한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데 이용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국제사회가 대북지원을 하지 않으면 북한 정권이 비축된 군량미라도 풀어서 주민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당연히 북한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식량지원을 하지 않는 것은 주민들의 고통을 무시하는 북한 정권의 행위를 심화시킬 뿐이다. ‘상식이 있는’ 한·미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의 생명을 놓고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북한 식량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도 한다. 아마도 수십, 수백만이 굶어죽은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과 비교해 그렇다는 것 같다. 배고픔의 고통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이 아직 굶어죽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도주의일까. 아이들이 영양결핍과 발육부진으로 정신적·육체적 불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말이다. 

국제사회가 리비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전격 결정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민간인 피해가 커진다는 시급함 때문이었다. 민간인 보호와 마찬가지로 식량지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국민들까지 고통받게 하는 행위(collective punishment)는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레이건 행정부 시절 미국은 반미·공산주의를 표방한 멩기스투 하일레 미리암 정권 치하의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돕기 위해 국내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식량지원을 결정한 적이 있다. 미국의 식량지원은 결국 멩기스투 정권의 붕괴를 초래했고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A hungry child knows no politics)”는 레이건의 명언은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미국은 이 빛나는 전통을 버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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