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빠져나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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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위안부 문제 빠져나가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2. 2.

지난해 12월28일 한·일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합의한 직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법적 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난 문제”라고 재확인했다. 의회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국가 범죄가 아니라고 부인했고 유엔에 제출한 문서에는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고 명시했다. 합의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스스로 종지부를 찍고 이것에 발목이 잡혀 할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일본의 눈치를 보고 있다. 반인도주의적 전쟁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대체 뭐가 뭔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합의가 나올 수 있었는지 파악하려면 박근혜 정부 들어 한·일 관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중요하고,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운 문제이긴 했지만 이 문제 때문에 한·일 관계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정상회담도 없다는 초강경 대일외교 기조를 들고 나와 한·일 관계의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버렸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민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 총리를 만나지 말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로 만들어 버렸다.


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있다._청와대사진기자단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전력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일본에 강한 모습을 보이려 했거나, 국민감정에 영합하는 대일 강경책으로 국내정치적 효과를 기대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최대 난제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외교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정책으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초강경 대일 자세를 취한 것은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 심각한 자충수였다.

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됨으로써 생기는 외교적 부담은 날로 커져갔다. 특히 한·미·일 협력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일 강경외교는 애초부터 오래 버틸 수 없는 구조였다. 결국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헤이그에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한자리에 앉혀 한·미·일 정상회담을 마련한 이후 이 같은 움직임은 본격화됐다. 박 대통령은 이때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을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장기적 과제로 돌린 뒤 일본과 정상적인 외교를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저질러놓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정치적 곤경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박 대통령의 대일 태도는 돌변했다. 지난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또 역사수정주의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국교정상화 50주년인 2015년이 지나가기 사흘 전에 위안부 문제 합의가 발표됐다. 전쟁범죄 가해국과 피해국의 합의라고는 볼 수 없는 굴욕적인 합의에 국민적 비판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합의를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국민적 비판에 대해서는 “정치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다”고 호통을 쳤다. 그리곤 이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하는 피해자들에게 ‘이게 최상의 결과이니 이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시라’고 한다.

이 합의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박 대통령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들을 밟고 그 함정에서 빠져나온 만행이다. 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추후에도 규명하지 못하도록 땅속에 파묻어버린 행위다. 이 합의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을 감안하면 그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합의는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면 뒤집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부담은 국민과 국가의 몫이 될 것이다. 국민들이야 대통령 잘못 뽑은 죄로감수해야 하겠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지금이 아니라도 좋으니 박 대통령은 피해자들이 전부 돌아가시기 전에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 이 굴욕적 합의에 대한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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